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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vs. 조선의 개혁, 왜 그 결과는 달랐는가? _ 일본과 조선, 근대화의 갈림길에서 갈라지다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11. 22:07
동아시아를 덮친 문명의 충격, 양국의 선택19세기 중반, 동아시아는 격랑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 에도만에 흑선(黑船)을 끌고 나타나 개항을 요구한 사건은 동아시아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습니다.중국은 아편전쟁(1840) 이후 서구 열강에 문을 열 수밖에 없었고, 일본과 조선 또한 더 이상 폐쇄적인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일본은 이 충격에 개혁으로 응답했고, 조선은 저항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로 인해 두 나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그 결과는 조선의 식민지화와 일본의 제국으로의 도약이라는 극단적인 차이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조선의 개화 시도를 비교를 비교하며 그 배경과 결과를 되짚어보겠습니다. 메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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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격랑 속 조선의 선택: 명나라의 몰락과 청나라의 부상, 조선의 외교적 줄타기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10. 10:45
명나라의 몰락, 중화질서의 붕괴명나라는 1368년 주원장이 원나라를 몰아내고 건국한 한족의 왕조로, 동아시아 중화질서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내부적인 모순과 외부의 침입이 겹치면서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특히 토지 제도의 붕괴, 지나친 세금 수탈, 환관 정치의 부패는 농민 봉기를 촉발했고, 그중 대표적인 것이 1644년 이자성의 반란이었습니다. 이자성은 수도 북경을 함락하고 명 황제를 자살로 몰아넣었으며, 이에 따라 명나라는 실질적으로 멸망하게 됩니다.하지만 이 혼란을 틈타, 동북방 만주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여진족(후일의 만주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 홍타이지는 점차 여진 부족을 통합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후금을 세운 뒤, 명나라에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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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과 세계 지리 인식의 변화: 동아시아 변방에서 지구적 시야로 나간 조선 지식인들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9. 08:53
조선 후기, 새로운 세상을 향한 작은 균열18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이어진 조선 후기, 내부적으로는 세도 정치와 농민 피폐, 외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압박이 점차 거세지며 시대는 격동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조선 사회에는 새로운 사유와 인식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으니 바로 실학(實學)의 등장입니다. 실학은 단지 유학 내부의 사상 분파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유용한 지식을 추구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이는 곧 유교적 가치관에 근거한 세계 인식, 즉 조선 중심, 중화 중심의 질서가 변화의 요구에 직면했다는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실학자들은 경제, 사회, 농업 개혁뿐 아니라, 지리, 역사, 외교, 과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면서 조선 지식 세계의 경계를 넓혀 나갔습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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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격랑 속 일본사 이야기: 사무라이와 막부, 그리고 임진왜란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9. 01:05
일본 전국시대를 연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시대를 뒤흔든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원래 보잘것없는 농민 집안 출신으로, 전국을 떠돌며 장사를 하던 떠돌이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운명을 바꾼 결정적인 만남이 있었으니, 바로 오다 노부나가와의 인연이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을 통일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장군이었고, 히데요시는 그의 밑에서 충성을 다하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워 이름을 날렸고, 결국에는 노부나가가 가장 아끼는 심복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하지만 역사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곤 하지요.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부하에게 암살당하면서 생을 마감하고 이후 노부나가 휘하의 세력은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치밀한 전략과 발빠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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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물이 동아시아에 스며들다: 청나라를 거쳐 조선으로 전해진 새로운 세계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8. 18:22
청나라에 유입된 서양 문물: 동서 교류의 물꼬를 트다청나라에 서양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시점은 17세기 중엽, 곧 강희제와 옹정제, 건륭제 시기를 전후한 때부터입니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을 대상으로 활발한 선교와 문화 교류를 벌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탈리아 출신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입니다. 그는 명나라 말기에 입국해 중국식 의복을 입고 유학을 공부하며 중국식 생활에 철저히 적응함으로써 청나라 조정과의 접촉에 성공합니다.서양 문물은 주로 선교 활동을 매개로 중국에 들어왔습니다. 과학기술, 천문학, 수학, 지리학, 회화, 음악 등 다방면의 학문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중에서도 특히 서양식 천문학은 중국 조정의 눈에 띄었습니다. 청나라 조정은 선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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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이 된 한국 기록문화의 위대함: 승정원일기, 동의보감, 일성록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8. 13:27
승정원일기: 가장 방대한 일일 기록, 세계 정치 기록문화의 정점는 조선 시대 왕의 비서기관이었던 승정원에서 매일 작성한 국정 일지입니다. 조선의 왕이 어떤 명령을 내렸고, 어떤 신하가 무슨 말을 했으며, 그에 어떤 반응이 있었는지를 모두 기록한 이 일기는 1623년부터 1910년까지 약 288년간 이어진 연속 기록으로, 총 3,243책, 약 2억 4천만 자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일일 정치 기록입니다. 세계사적으로도 이 정도 규모와 연속성, 일상성(日常性)을 갖춘 기록은 찾기 어렵습니다.서양의 군주 기록물인 나 는 특정 사건에 집중하거나 편찬 간격이 불규칙하지만, 는 거의 매일 빠짐없이 기록되었습니다. 중국의 실록 체계도 왕의 공식 연대기라는 점에서 의미는 있으나 일기 형식의 정치 운영 기록은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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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과 육조거리, 종묘와 사직단: 한양 도시에 새겨진 세계사적 철학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8. 01:39
조선의 수도 한양, 정치와 철학이 만난 이상도시조선은 단지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가 지향하는 이상적 질서와 철학적 세계관을 도시 공간 속에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이 도시가 바로 한양, 그리고 그 핵심을 이루는 것이 경복궁, 육조거리, 종묘, 사직단입니다. 이 네 공간은 단순한 건축물이나 역사 유적이 아니라 조선이 추구한 유교 정치철학이 구체화된 상징적 공간체계였습니다.한양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이념을 물리적 공간에 투영한 거대한 무대였습니다. 오늘날의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는 이 네 요소는 그 자체로 한국사의 정수를 보여줄 뿐 아니라 도시 공간 안에 권력, 제도, 윤리, 우주의 질서를 배치한 세계사적 모범 사례로 주목받습니다. 도시를 단순히 행정과 생활의 공간이 아닌,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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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왜 '도자기 전쟁'이라 하는가? - 세계사 속에서 다시 읽는 조선 도공의 운명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7. 18:10
임진왜란은 단순한 침략 전쟁이 아니었다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며 벌어진 대규모 전쟁입니다. 조선과 일본, 명나라가 얽힌 이 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라, 기술과 인력, 자원의 약탈을 동반한 복합적인 충돌이었습니다. 특히 이 전쟁이 '도자기 전쟁(Ceramic War)'으로도 불리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조선의 뛰어난 도공들이 일본으로 대거 납치되었고, 이들이 일본 도자기 문화의 기반을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도자 기술은 일본에는 군사적 승리 이상의 중요한 전리품이었습니다. 조선 도자기의 예술성과 기술력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백자와 청자 기술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수준이었습니다. 특히 16세기 중후반은 조선 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