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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와 바로: 로마 지식인의 세계관과 학문의 뿌리로마사 2025. 9. 18. 18:15
로마사와 바로, 고대 로마 지식인의 초상로마사에서 바로(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기원전 116~27년)는 흔히 가장 학식 있는 로마인으로 불린다. 정치가, 장군, 학자, 문필가라는 다채로운 이력을 지닌 그는 공화정 말기의 격변기를 살며,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키케로가 그를 두고 "우리 시대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바로는 잚은 시절부터 정치에 발을 들였고, 술라의 내전과 카이사르의 정치적 부상 같은 혼란 속에서 군사적 경험도 쌓았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빛난 영역은 학문이었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정치적 실패나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학문적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학문은 단순히 지적 유희가 아니라, 로마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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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와 루쿨루스: 잔치와 원정 사이에서 남은 모순된 유산로마사 2025. 9. 18. 04:28
로마사와 루쿨루스의 원정: 동방에서 거둔 빛나는 승리로마사와 루쿨루스는 공화정 후기의 격동기 속에서 동방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장군으로 남아 있다. 기원전 1세기, 그는 미트리다테스 6세가 이끄는 폰토스 왕국과의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로마는 동방의 패권을 확립하고자 했으나, 미트리다테스는 아나톨리아와 그리스 세계에서 로마의 지배에 대항하며 끈질긴 저항을 이어갔다. 루쿨루스는 군사적 천재성을 발휘해 병참을 정비하고 보급로는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장기전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특히 아르메니아의 수도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에서 그는 수적으로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민한 전술 운용으로 대승을 거두며 로마의 군사적 위신을 크게 높였다.그러나 그의 원정은 단순히 전투에서의 승리로만 의미가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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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속 키케로: 웅변가의 정치와 철학적 유산로마사 2025. 9. 15. 22:54
로마사와 키케로, 공화정의 목소리로마사 속 키케로(Cicero)는 웅변과 지성을 무기로 삼아 정치의 중심으로 나아간 드문 인물이었다. 기원전 106년 아르피눔 출신으로 태어난 그는 로마 귀족 사회의 정통 혈통이 아니었다. 기사 계급 출신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법률가로서의 탁월한 재능과 논리적인 변론술, 누구도 따라오기 어려운 웅변술로 불리한 출발점을 극복했다. 그는 재판정에서 승리를 거듭하며 이름을 알렸고, 결국 원로원으로 진출하여 로마 정치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특히 그의 연설은 '로마의 혀'라는 별명을 낳을 정도로 강렬했으며, 한마디 말로 군중의 여론을 바꾸고 원로원의 결정을 움직일 만큼 위력이 있었다.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기원전 63년 집정관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터진 '카탈리나 음모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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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와 세네카: 네로의 스승이 남긴 철학적 고뇌로마사 2025. 9. 13. 22:16
로마사와 세네카, 권력의 곁에 선 철학자로마사 속에서 세네카는 단순히 학문에 몰두한 철학자가 아니라, 권력의 심장부를 직접 경험한 지식인으로 기록된다. 그는 스토아 철학을 기반으로 이성과 절제를 강조했지만,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네로 황제의 스승이 되었다. 네로가 열여섯 니아로 황제 자리에 올랐을 때, 세네카는 그에게 학문과 도덕을 가르친 스승이자 정치적 조언자로 제국의 운영을 돕게 되었다. 철학자의 삶이 정치의 중심으로 끌려 들여간 순간이었으며, 세네카는 로마사에서 드물게 철학자-정치가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세네카의 정치적 등장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황후 아그리피나는 아들의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학식과 명망을 지닌 인물을 곁에 두려 했고, 그 결과 세네카가 선택되었다. 초기에는 그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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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속 리비우스: 제국의 역사 서술자, 진실과 선전의 경계로마사 2025. 9. 13. 12:34
로마사 속 리비우스: 제국의 서사를 맡은 역사가로마사에서 리비우스(Titus Livius, 기원전 59~서기 17)는 단순한 역사가를 넘어, 제국의 서사를 정립한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카이사르 내전의 혼란이 막 끝나고, 아우구스투스가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던 시기에 활동했다. 라는 방대한 저작은 건국 신화에서 그의 동시대에 이르는 수백 년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다루며, 로마가 작은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세계의 제국으로 성장한 과정을 보여준다.리비우스는 사실보다는 이야기에 무게를 두었다. 그는 전승된 설화와 전통을 풍부하게 인용하며, 독자들에게 로마적 정신과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려 했다. 그래서 그의 글은 학문적인 사료 비판보다는 문학적 서사에 가까웠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아우구스투스 시대와 잘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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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와 폼페이우스: 대제국을 설계했으나 권력에서 밀려난 장군로마사 2025. 9. 12. 22:46
로마사와 폼페이우스: 젊은 장군의 화려한 부상로마사에서 폼페이우스는 일찍이 두각을 드러낸 비범한 장군이었다. 그는 기원전 106년, 이탈리아 중부 피켄툼 지방의 기사 계급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역시 장군이었기에 군사적 경험을 어린 시절부터 접할 수 있었고, 젊은 시절부터 병사들을 지휘하는 재능이 남달랐다. 내전에서 술라 편에 가담하면서 그는 운명의 전환점을 맞았다. 술라가 원로원 귀족 세력을 대표했다면, 폼페이우스는 그의 충실한 후계자로서 활약하며 빠르게 군사적 명성을 얻었다. 그가 이끄는 군대는 질서와 규율이 철저해 병사들 사이에서 두려움과 존경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당시 로마사에서 "소년 장군"이라 불리며 카이사르가 떠오르기 전까지 가장 주목받던 차세대 영웅이었던 것이다. 그의 명성은 전쟁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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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속 그라쿠스 형제: 토지 개혁이 불러온 공화정의 균열로마사 2025. 9. 11. 23:56
로마사와 그라쿠스 형제의 등장 배경로마사는 공화정의 발전 과정 속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타협, 그리고 위기를 반복해온 정치 실험의 무대였다. 특히 고대 로마사에서 기원전 2세기 후반은 겉으로는 제국의 팽창과 번영이 절정에 달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균열이 심화하던 시기였다.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장악하면서 막대한 전리품과 노예가 수도와 귀족들에게 쏟아져 들어왔으나, 그 부와 기회는 사회 전반으로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반대로 자영농은 전쟁으로 장기간 농토를 떠나야 했고, 귀족과 부유층은 라티푼디아라 불린 대토지를 노예 노동으로 운영하며 더 큰 부를 축적했다.그 결과, 로마 사회의 중산층을 이루던 소농 계급은 몰락했고,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들어 빈민층으로 전락하거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 시혜에 의존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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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로 읽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고대 로마를 뒤흔든 외침로마사 2025. 9. 8. 04:59
로마사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던진 충격로마사에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단순한 노예들의 봉기가 아니라 고대 로마사 전체를 뒤흔든 자유의 외침이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며 최전성기를 구가했지만, 화려한 영광 뒤편에는 수많은 노예의 눈물이 배어 있었다. 정복 전쟁에서 끌려온 노예들은 라티푼디아라 불린 대토지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고, 도시에서는 검투사 훈련소와 원형 경기장에서 생사를 건 오락의 도구로 내몰렸다. 트라키아 출신의 전쟁 포로였던 스파르타쿠스는 바로 이 같은 구조의 산물이었다. 그의 반란은 억눌린 분노가 폭발한 사건이자, 로마 제국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사회적 균열이었다. 당시 로마 원로원은 이 사건을 단순한 치안 문제로 다루려 했지만, 곧 이 반란이 공화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