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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와 바로: 로마 지식인의 세계관과 학문의 뿌리로마사 2025. 9. 18. 18:15
로마사와 바로, 고대 로마 지식인의 초상
로마사에서 바로(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기원전 116~27년)는 흔히 가장 학식 있는 로마인으로 불린다. 정치가, 장군, 학자, 문필가라는 다채로운 이력을 지닌 그는 공화정 말기의 격변기를 살며,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키케로가 그를 두고 "우리 시대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바로는 잚은 시절부터 정치에 발을 들였고, 술라의 내전과 카이사르의 정치적 부상 같은 혼란 속에서 군사적 경험도 쌓았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빛난 영역은 학문이었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정치적 실패나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학문적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학문은 단순히 지적 유희가 아니라, 로마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도구였다. 바로의 생애는 곧 로마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 즉 실천과 학문을 동시에 추구하며, 공화국의 존립을 위해 지식을 실용화하려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고대 로마 지식인의 초상,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로마사와 고대 로마 지식인의 학문 전통
로마사가 드러내는 지식인의 특징은 그리스 철학을 단순히 모방하지 않고, 로마적 현실에 맞추어 재해석했다는 점이다. 그리스 철학이 진리 탐구와 사변적 이론에 치중했다면, 로마의 학문은 실생활과 정치적 필요에 강하게 연계되었다. 바로는 이러한 흐름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저작 <농업에 관하여>는 단순한 농업 기술서가 아니다. 그는 농장의 운영 방식, 토양 관리, 가축 사육, 노예 노동의 활용까지 세밀하게 기록하며 로마 경제를 뒷받침하는 토대가 무엇인지 체계화했다. 특히 "농업은 모든 기술 가운데 가장 고귀하다"라는 그의 말은, 농업이 단순히 경제적 활동이 아니라 로마 군대의 병참과 도시의 생존을 떠받치는 핵심임을 일깨워준다. 로마 지식인에게 학문은 추상적 담론보다 국가를 지탱하는 실질적 기반을 다지는 일이었다.
또 다른 저작인 <라틴어에 관하여>에서 바로는 라틴어의 어원과 문법 체계를 분석했다. 이는 제국이 확대되면서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혼합되는 상황에서, 로마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한 시도얐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을 넘어, 로마 시민의 정체성과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바로의 언어학 연구는 후대 문법학의 기초가 되었고, 제국의 문화적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마사와 바로의 종교관, 그리고 세계관의 확장
바로의 저술 가운데 특히 주목받는 것은 <신들의 고유성>이다. 비록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아우구수티누스의 <신국론> 속 인용을 통해 그 내용의 일부가 전해진다. 바로는 신들을 세 가지 차원에서 구분했다. 자연적 신학(자연과 우주 질서로서의 신), 시민적 신학(국가와 종교의식 속의 신), 신화적 신학(시인들이 묘사한 신). 그는 이 분류를 통해 종교를 단순히 초자연적 신앙이 아닌, 사회와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는 제도적 장치로 이해했다.
이러한 종교관은 로마 지식인의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신은 인간과 동떨어진 절대자가 아니라 농업, 전쟁, 가정, 정치 등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였다. 바로는 이 질서를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로마 종교를 합리적으로 정리하려 했다. 이는 곧 제국의 종교적 정체성을 확입하고, 론란스러운 공화정 말기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지적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로마 신화를 그리스 신화와 비교하면서 로마적 특수성을 강조했다. 로마가 그리스 문화를 흡수하면서도 자신만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눈 시도가 바로의 학문 속에 반영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 로마 지식인이 단순히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로마화하여 자신들의 세계관을 확립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로마사와 바로의 정치적, 문화적 역할
바로의 활동은 단순히 학문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 '지식인의 책무'를 자각하고, 학문을 국가 운영에 연결시키려 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저작 - 일부는 오늘날 완전히 소실되었지만 -은 농업, 언어, 철학, 역사, 법률, 군사, 종교 등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했다. 고대 전승에 따르면, 그는 약 620권에 달하는 저작을 남겼다고 한다. 이 방대한 자식의 체계화는 로마 지식인이 단순한 문필가가 아니라, 사회 운영에 기여하는 실질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잘 보여준다.
정치적으로는 카이사르의 도서관 건립 계획에 참여하여, 로마에 '국립도서관' 깉은 개념을 도입하려 했다. 이는 지식의 축적과 보존이 제국의 영속성을 지탱한다는 믿음을 반영한다. 비록 정치적 변동으로 그의 구상은 완전하게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 의도만으로도 로마 지식인의 미래 지향적 시각을 엿볼 수 있다.
로마사와 바로가 남긴 유산, 그리고 오늘의 의미
로마사의 흐름 속에서 바로의 유산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의 저작은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유럽 지성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언어학 연구는 스톨라 학자들에게 참고가 되었고, 종교 분류론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게 학문적 모범이 되었다. 농업에 관한 기록은 중세 수도원과 농장 운영에도 전해져 실질적 도움을 주었다.
비록 그의 저작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남은 파편들만으로도 그의 사상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방대했는지 알 수 있다. 바로의 학문은 로마 지식인의 세계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실용성과 정체성, 그리고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바로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지식은 개인의 성취를 위한 장식물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원동력이다. 디지털 시대에 정보가 넘쳐나는 지금, 우리는 오히려 바로가 강조한 실용적 지식과 공동체적 책임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로마사가 남긴 바로의 초상은 시대가 달라져도 변치 않는 지식인의 본문을 묻는 살아 있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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