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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사 속 키케로: 웅변가의 정치와 철학적 유산
    로마사 2025. 9. 15. 22:54

    로마사와 키케로, 공화정의 목소리

    로마사 속 키케로(Cicero)는 웅변과 지성을 무기로 삼아 정치의 중심으로 나아간 드문 인물이었다. 기원전 106년 아르피눔 출신으로 태어난 그는 로마 귀족 사회의 정통 혈통이 아니었다. 기사 계급 출신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법률가로서의 탁월한 재능과 논리적인 변론술, 누구도 따라오기 어려운 웅변술로 불리한 출발점을 극복했다. 그는 재판정에서 승리를 거듭하며 이름을 알렸고, 결국 원로원으로 진출하여 로마 정치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특히 그의 연설은 '로마의 혀'라는 별명을 낳을 정도로 강렬했으며, 한마디 말로 군중의 여론을 바꾸고 원로원의 결정을 움직일 만큼 위력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기원전 63년 집정관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터진 '카탈리나 음모 사건'이다. 키케로는 음모자 카틸리나가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탈취하려 한다는 사실을 폭로하며 네 차례에 걸친 연설을 통해 원로원과 시민을 설득했다. "오, 카탈리나여, 언제까지 우리의 인내를 시험할 것인가?"로 시작하는 이 연설은 오늘날까지도 정치 수사학의 교과서로 꼽힌다. 그러나 이러한 활약은 그에게 명성을 안겨줌과 동시에, 권력자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며 평생을 위태롭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사와 키케로의 정치적 투쟁

    로마사 속 키케로의 정치 여정은 곧 공화정의 몰락기의 권력 투쟁사와 겹친다. 그는 일관되게 원로원 중심의 전통적 질서를 수호하려 했고, 무력과 개인의 야망이 지배하는 정치를 경계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이상과 달랐다. 술라의 독재 이후,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 같은 강력한 장군들이 정치 무대를 장락하며 삼두정치를 이루었고, 키케로의 입지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는 귀족적 보수 세력과 동맹을 맺으면서도, 때로는 실리를 택해 권력자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후대 역사가들은 그를 두고 '원칙적인 공화파'와 '기회주의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내린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며 내전을 일으켰을 때 키케로는 갈등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독재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그에게 맞서 싸우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공화정의 편에 섰으나, 카이사르가 승리하자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잃었다. 이후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에는 다시 공화파를 지지하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동조했지만,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주도한 새로운 정치 질서 속에서 키케로는 고립되었다. 특히 그는 안토니우스를 향해 '필리피카'라 불리는 격렬한 연설을 쏟아내며 부패와 폭정을 비난했으나 이는 곧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원인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끈질긴 발언은 공화정이 끝나가는 로마사의 시대적 풍경을 선명히 각인시켰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기원전 43년 마르쿠스 안토니의 지휘를 받는 군인들에 의해 들것에서 끌려 나와 암살당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기원전 43년 마르쿠스 안토니의 지휘를 받는 군인들에 의해 들것에서 끌려 나와 암살당했다.

     

    로마사와 키케로의 철학적 사항

    로마사 속 키케로는 단순한 정치가가 아닌 철학자이자 지성인이었다. 그는 그리스 철학의 거대한 유산을 로마 사회에 전달한 중개자였다. 젊은 시절 아테네와 로도스에서 수학하며 스토아 철학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깊이 매료되었고, 이를 로마적 맥락에 맞게 정리하여 라틴어로 저술했다. <국가론>에서 그는 이상적 국가는 정의와 법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법률론>에서는 자연법 개념을 발전시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도덕적 법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히 로마의 법 체계에 국한되지 않고, 후대 서양 정치사상의 기초를 형성했다.

    그의 사상은 특히 '정치가의 도덕적 책임'에 무게를 두었다. 키케로는 권력자가 권력을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철학과 정치가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으며, 정치적 실천은 철학적 성찰을 통해서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라틴어 문체는 이후 인문주의자들에게 글쓰기의 모범이 되었고, 그의 사상은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과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로마사 속 키케로의 저작은 단순한 정치 논문을 넘어, 서양 지성사의 흐름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

     

    로마사와 키케로의 유산, 그리고 오늘

    로마사 속 키케로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치가 결성되면서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정적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키케로를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결국 키케로는 암살당했고, 그의 머리와 손은 원로원 연단에 전시되었다. 이는 웅변과 저술로 권력을 견제했단 한 정치가가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공화정 말기의 폭력적 정치 문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사상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은 키케로의 문장을 최고의 라틴어로 추앙하며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았다. 또한 근대 유럽의 정치사상가들, 나아가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인물들까지 그의 자연법 사상에서 영감을 얻었다. 오늘날 키케로는 단순하 로마사 속 정치인이 아니라, 서구 문명의 지적 전통을 형성한 기둥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의 유산은 "말과 글은 권력보다 오래 간다"는 사실을 웅변하며, 시대를 넘어선 지적 유산의 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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