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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민국가의 등장과 조선의 민족 개념 - 백성에서 국민으로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6. 24. 23:31
국민국가의 탄생: 중세를 넘은 새로운 정치의 틀
국민국가(nation-state)는 근대 세계사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다. 과거의 세계가 제국이나 봉건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근대 이후의 세계는 명확한 영토와 법률, 그리고 국민이라는 구성원 위에 세워진 국가가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7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 전쟁을 거치며 본격화되었다.
프랑스 혁명(1789년)은 특히 국민(nation)이라는 개념을 정치적 실체로 처음 드러낸 사건이다. 이때까지의 프랑스인은 국왕의 신민(臣民)이었지만, 혁명을 통해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생각이 정착되며 '국민'이라는 공동체의식이 생겨났다. 이로 인해 왕의 백성이 아니라 헌법과 법률 아래 평등한 시민이 탄생했고, 이는 곧 국민국가라는 새로운 국가 모델을 가능케 했다. 국민국가는 단지 통치의 방식만 바꾼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체성과 소속감 자체를 새롭게 구성한 정치 질서였다.
이와 같은 근대 국민국가의 등장은 단순히 유럽 내부의 일이 아니었다. 제국주의의 확장과 함께,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의 피지배 국가들도 국민국가를 이상적인 모델로 인식하게 되었고, 자국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담론 속에서 민족과 국민이라는 단어는 점점 중요한 정치 언어가 되었다.
조선 후기의 백성 개념: 유교적 질서 속의 신민
조선은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왕도정치를 구현한 국가였다. 조선의 군주, 곧 임금은 하늘의 명령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였고, 이에 따라 백성들은 임금의 자애로운 통치를 받는 신민으로 간주되었다. 백성이라는 말은 단지 민중이나 일반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임금의 보호 아해 놓인 존재로서의 신분적, 정치적 지위를 내포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경국대전>과 같은 문헌에서도 반복되는 말은 "백성을 하늘같이 여겨라"는 유훈이었으며, 이는 위로부터의 자비와 아래로부터의 충성을 전제로 한 위계적 질서였다. 조선의 백성은 자기결정권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잘 다스려져야 할 존재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조선 사회에서 국민이라는 개념은 아직 싹트지 않은 상태였으며, 민중은 국가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이후 실학의 확산과 사회 경제 구조의 변화 속에서 백성에 대한 인식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정약용은 백성이 곧 나라라는 생각을 표현하며 민본사상을 한층 더 실천적으로 전개했고, 농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정치개혁안을 제시했다. 이는 훗날 민족주의의 씨앗으로 발전할 사상적 기반이었다.
조선의 백성은 자기결정권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잘 다스려져야 할 존재로 간주되었다 외세의 침략과 민족의 자각: 조선 사람에서 조선 민족으로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은 격동의 시기를 맞이한다. 서구 열강의 침략,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조선은 점점 국제 질서에서 고립되었고, 내부적으로는 정치적 부패와 경제적 침체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내부의 지식인과 민중들은 점차 우리라는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다.
1880년대부터 시작된 개화기 담론에서, 새로운 개념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국가, 국민, 헌법, 자주, 민권 등이 그것이다. 이는 대부분 일본과 서양에서 들어온 번역이었고, 기존의 조선 유교 질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언어들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언어들이 단순한 차용을 넘어서 조선 현실에 맞게 재해석되면서 민족 개념의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 서재필, 박영효, 유길준 등의 개화파 인사들은 백성이 아닌 국민이라는 용어를 점점 사용하기 시작한다. 특히 <독립신문>에서는 국민의 권리, 국민의 의무라는 말이 반복되며, 국가를 구성하는 실질적 주체로서의 국민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이는 곧 조선 민족이라는 집합적 정체성과 결합되어, 국가의 주인은 더 이상 왕이 아니라 민족이며, 그 구성원인 국민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하였다.
대한제국기와 민족의 정치화: 백성의 자리에서 국민으로 이동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국 체제를 선언하였다. 이는 명목상 자주독립을 강조한 조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한제국 역시 근대 국민국가의 틀을 점차 받아들이고 있었다. <대한국 국제> 제1조에는 "대한은 자주독립제국이요, 대황재는 이를 통치한다"는 문장이 들어가며, 조선이라는 왕국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보인다.
같은 시기, 교육 제도와 언론 제도, 우편과 철도, 화폐 등 근대 국가를 구성하는 제도들이 차례로 도입되었고, 이는 백성들에게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서서히 심어주었다. 특히 의병 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은 조선 사람이라는 종족적 정체성을 넘어, 조선 민족이라는 공통체적 인식을 강화시켰다.
1907년 이후의 신민회 활동, 국채보상운동, 그리고 한일합방 이후의 3.1운동은 이러한 흐름의 절정이었다. 3.1독립선언서에는 "조선은 조선인의 것이며, 모든 조선인은 이 나라의 주인이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는 명백히 백성에서 국민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선언적 언어였다. 민족은 더이상 문화나 혈통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국가를 세울 수 있는 정치적 권리를 가진 국민의 공동체였다.
세계사 속 조선의 국민 개념 형성: 보편성과 특수성의 접점에서
조선의 백성이 국민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단지 한국사의 내적 발전에만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의 국민국가 자제가 세계 질서의 보편 모델로 자리 잡는 가운데, 조선이 그 흐름에 대응하면서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이었다. 다시 말해, 민족주의는 조선의 자생적 사상에서 출발했지만, 그 형성은 세계사적 압력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슬람 세계, 중국, 일본, 인도 등 동시대의 제국들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주의를 내세우며 국민국가화하려고 했고, 청나라는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 담론 속에 흡수되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국민교육과 징병제를 실시하며 국민 만들기를 가장 먼저 성공시켰다. 조선은 그 중간 어디쯤에서 고유한 형태로 민족-국민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처럼 백성에서 국민으로의 전환은 단지 용어의 변화가 아니라, 권력의 구조와 인간의 자각, 역사 인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과정을 의미했다. 조선은 결국 이 과정을 식민지라는 고난의 시기를 지나야 했지만, 그 속에서 국민국가의 싹을 틔웠고, 이는 훗날 대한민국 건국과 민주주의 발전의 밑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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