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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계의 과학 전성기와 조선의 실학 - 지식은 어디에서 오는가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6. 21. 09:48
이슬람 과학 전성기: 고대의 지식을 다시 꽃피우다
이슬람 세계의 과학 전성기는 세계사에서 '지식의 황금기'로 불릴 만큼 찬란한 시기를 이룩하였다. 이슬람 과학 전성기는 주로 8세기에서 13세기까지, 특히 아바스 왕조 시대의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바그다드에 세워진 '지혜의 집(Bayt al-Hikma)'은 단순한 도서관을 넘어, 고대 그리스.로마의 지식을 번역하고 연구하며 새로운 이론을 창조하는 학문의 중심지였다. 수학에서는 알-콰리즈미(Al-Khwarizmi)의 대수학이 등장하였고, 그의 이름은 훗날 '알고리즘(Algorithm)'이라는 단어로 남았다. 의학 분야에서는 이븐 시나(Avicenna)의 <의학정전>이 유럽 중세 의학의 교과서가 되었으며, 천문학에서는 알-바타니(Al-Battani), 알-주자니 등이 관측기구를 개발하고, 지구의 둘레를 계산하였다.
이슬람 과학자들은 고대의 지식을 단순히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험과 관찰을 통해 그 지식체계를 정련해갔다. 특히 천문학은 이슬람 과학의 정수라 할 만하다. 메카를 향한 기도 방향을 정확히 설정하기 위한 필요에서 천문학은 정교하게 발전했고, 이러한 학문은 종교의 실천과도 밀접히 연결되었다. 이들은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신앙의 의무'라고 믿었고, 그 믿음은 과학기술의 진보로 이어졌다. 당시 유럽이 중세 암흑기 속에 있을 때, 이슬람 세계는 수학, 물리, 철학, 지리, 화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지식을 선도하고 있었다.
이슬람 과학의 세계사적 확산과 영향
이슬람 과학 전성기는 단지 이슬람 세계 내부에 머무르지 않았다. 십자군 전쟁과 안달루시아의 코르도바를 통한 문화 교류, 특히 12세기 라틴 번역 운동을 통해 이슬람 세계의 과학 지식은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이로 인해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스콜라 철학자들은 아리스트텔레스 철학을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의 주석을 통해 접하게 되었고, 르네상스와 근대 과학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슬람 과학은 유럽에 결정적인 자극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 고려, 조선에도 점진적으로 그 흔적을 남겼다. 명나라를 통해 들어온 아라비아식 천문기구와 역법은 조선 후기까지 영향을 끼쳤고, 조선의 일부 실학자들은 이슬람식 지구관과 우주론을 서학서적과 중국 문헌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즉, 이슬람 과학은 서양 근대를 자극했을 뿐 아니라, 조선의 실학이라는 지식 운동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셈이다.
이슬람 과학은 유럽뿐 아니라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페르시아의 염료공장 포스터 조선 실학: 경험과 실용에 눈을 뜬 유학자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기존 성리학 중심의 경세체제에 대한 반성이 커졌다.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고, 농업 생산과 국가 경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지식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실학이다. 실학은 "사물의 이치를 경험적으로 파악하고 실천 가능한 지식을 추구한다"는 사조로, 종래의 형이상학적 성리학과는 결을 달리했다.
이익, 유형원, 정약용 등으로 대표되는 실학자들은 토지 제도 개혁, 기술 개발, 인문지리학의 확장, 농업 기술서 편찬 등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정약용은 수원화성 건축과 거중기 발명 등에서 공학적 지식을 응용했고, <기예론>과 같은 기술 관련 서적에서도 관찰과 경험을 중요시했다. 이는 단순한 철학적 제안을 넘어 '기술공학적 유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사례였다.
흥미롭게도 실학자들이 의식한 세계는 단지 중국에 머물지 않았다. <지구도설>이나 <혼천설>, <성호사설>에는 천리경, 화포, 자명종, 전기 등 서양 문물의 소개가 등장하고, 이 중 일부는 이슬람을 통해 중국을 전래된 과학기술이었다. 이는 조선 실학이 비록 간접적일지라도 이슬람 과학의 세계 확산 경로 속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식의 흐름: 이슬람에서 서구로, 그리고 조선으로
세계사 속 지식의 흐름을 살펴보면, 고대 그리스에서 아라비아로, 아라비아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다시 조선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조선은 단절된 섬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가 개척한 과학의 맥이 서학이라는 옷을 입고 건너온 동아시아 지식의 종착지 중 하나였다. <성호사설>에 등장하는 이슬람 천문학과 의학에 대한 언급, <지구도설>의 구체적인 지구 구상은 이를 입증한다.
실학자들은 유학이라는 전통 철학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외부 세계에 대한 관찰과 비판, 응용을 통해 조선 사회를 보다 실용적으로 개혁하려 하였다. 이는 이슬람 세계의 과학자들이 신앙심을 유지한 채 관찰과 실험을 중시한 태도와 유사한다. 신에 대한 믿음과 현실에 대한 탐구가 상호 대립하지 않고 조화롭게 결합된 것이다.
이슬람 과학과 조선 실학의 공통점과 시사점
이슬람 과학과 조선 실학은 시공을 초월해 놀라운 공통점을 보여준다. 첫째, 둘 다 전통 지식의 재해석에 기반하고 있다. 이슬람 세계는 고대 그리스 지식을 번역하고 확장했으며, 조선 실학은 유교 고전을 현실 정치와 경제에 맞게 재구성하였다. 둘째, 두 사조 모두 관찰, 경험, 실용을 중시했다. 특히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이븐 시나의 <의학정전>은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탄생했지만, 실제 문제 해결을 중시한 점에서 유사하다.
셋째, 이들은 모두 지식의 보편성과 인류적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슬람 과학은 종교의 틀 안에서 타 문화의 지식을 흡수했고, 실학은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에서 벗어나 외국 문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세계사 속에서 한국사를 조명할 때, 폐쇄된 민족주의가 아닌 열린 세계주의적 시각으로 접근해야 함을 시사한다.
지식은 연결되고, 역사는 흐른다
조선의 실학과 이슬람 과학 전성기는 각각의 시대와 지역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어떻게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그에 대한 해답은 성찰과 실험, 믿음과 실용, 전통과 개혁의 조화 속에 있었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다시금 질문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실학은 무엇이며, 오늘날의 과학은 어떤 가치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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