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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죽음 이후 조선 정치의 격랑과 세계사의 거대한 소용돌이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23. 09:05
정조의 죽음, 조선 정치의 중대한 전환점
정조의 죽음은 조선 정치의 커다란 단절을 남기고 새로운 격동기를 열었습니다. 조선 제22대 왕 정조(재위 1776~1800)는 개혁 군주로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탕평책을 추진하고, 규장각 설치, 수원화성 건설, 실학의 장려 등을 통해 조선을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중흥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개혁이 지속될 수 있도록 세심한 준비를 해왔으나 1800년 6월, 갑작스럽게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조선의 미래는 미궁에 빠지게 됩니다.
정조의 뒤를 이은 왕은 그의 아들 순조였습니다. 그러나 순조는 불과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정조의 유훈정치는 실현되기 어려웠습니다. 어린 왕의 섭정은 대비였던 정순왕후 김씨가 맡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세도 정치'라는 새로운 권력 질서가 등장하게 됩니다.
정조가 세운 수원화성 세도정치의 등장과 조선 사회의 변질
세도정치란 특정 외척 가문이 국정을 독점하며 왕권이 사실상 무력화되는 구조를 말합니다. 정순왕후 김씨의 배경인 경주 김씨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조선은 정치적 후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몇몇 외척 가문이 돌아가며 권력을 독점하며 조선 후기 19세기 내내 세도정치가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기 조선 사회는 심각한 부패와 피폐에 빠졌습니다. 비변사 중심의 국정 운영이 관행화되면서 중앙의 행정은 무기력해졌고, 지방은 수령의 전횡과 탐관오리의 수탈로 농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습니다. 특히 과거 제도를 통한 인재 등용이 무력화되며 권문세가의 자식들만ㅇ 관직을 독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농민 반란, 예컨대 홍경래의 난(1811), 임술농민봉기(1862) 등 전국적인 민란으로 이어지는 사회 불안을 불러왔습니다.
한편 정조 사후 조선의 실학자들과 개혁 지식인들은 점차 위축되거나 탄압당하였고, 학문은 다시 형식적 성리학 중심으로 퇴행하였습니다. 이처럼 정소의 죽음은 단순한 군주의 죽음이 아니라, 조선 후기 정치 개혁의 가능성을 닫아버린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세계사의 흐름: 근대의 파도가 몰려오던 시기
정조가 죽은 1800년은 세계사적으로도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1789~1799)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고, 1799년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며 프랑스 제1통령이 되었습니다. 1804년 그는 황제로 즉위하며 유럽은 다시금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됩니다.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은 유럽 전역을 넘어서 전 세계로 확산된 제국주의적 전쟁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며 영국은 해상 패권을 장악했고, 새로운 산업자본주의가 세계경제를 재편하고 있었습니다. 식민지 확장 경쟁이 본격화되며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는 유럽 열강의 영향권에 점차 편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19세기 초는 근대 세계 질서가 태동하는 시기였지만, 조선은 세도 정치에 갇혀 안으로만 침잠하며 이러한 세계사의 흐름을 체감하지 못했습니다. 정조는 재위 중 청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서학(천주교)이나 서양 문물에 대한 정보도 받아들이려 했으나, 그의 죽음 이후 조선은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 강화로 다시금 폐쇄적인 체제로 돌아가게 됩니다.
외세와의 충돌: 세계사 속 조선의 위치
정조 사후 약 50년 뒤, 조선은 점차 서구 열강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세계사적 흐름에서 조선이 점점 주변부로 밀려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1839년 제1차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이 서구 열강에게 문호를 열자, 아시아 전역에 대한 열강의 식민 침투는 가속화됩니다. 조선은 청과 일본 사이에서 변방의 위치에 있었지만, 서양 상선의 출몰, 러시아 남하, 일본의 개항 등 외세의 위협은 갈수록 거세졌습니다.
정조가 유지하려 했던 유교적 질서와 강력한 중앙 집권은 사라지고, 조선은 사상적, 정치적으로 대응 능력을 상실한 채 근대의 문턱에서 주저앉게 됩니다. 이러한 국정의 혼란은 결국 1860년대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이어지며, 외세의 위협에 맞서 국정을 다시 강권적으로 통제하려는 시도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 대응에 불과했고, 조선은 근대국가로의 체질 전환에 실패한 채 제국주의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들어가게 됩니다.
조선의 내부와 세계사의 간극: 정조 사후 100년의 교훈
정조의 죽음 이후 조선이 선택한 길은 세계사적 변화에 역행하는 길이었습니다. 세계는 민족주의, 자유주의, 공화주의의 물결 속에서 정치 개혁과 산업화, 제국주의적 팽창을 본격화하였지만, 조선은 외척 중심의 세도 정치와 성리학적 이념의 고착에 의해 폐쇄와 정체를 선택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선은 세계사라는 무대에서 점차 고립되어 갔습니다. 이는 단지 기술의 후진성이나 군사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시대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정치 구조와 사상적 유연성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만약 정조의 개혁 노선이 지속되었다면, 조선은 보다 능동적인 근대화 경로를 택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정조 사후 100년이 지나, 조선은 결국 개항과 함께 제국주의의 먹잇감이 되었고, ,1910년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그 시발점이 바로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 이후 등장한 세도정치 체제였다는 점은 한국사와 세계사 모두에 중요한 반추의 대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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