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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와 만국평화회의 - 제국주의 격랑 속 대한의 외교 항해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21. 22:59
제국주의의 회오리 속, 대한제국의 고립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세계는 제국주의 열풍에 휩싸였습니다. 영국은 인도를 중심으로 아시아를 장악했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반도를 식민지화했으며,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고 태평양으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동아시아는 '식민지 시장'으로 전락했고, 조선은 그 한복판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했고,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며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습니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세계 질서 아래에서 국제회의는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그들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고, 조선은 이 기회를 통해 절박한 외교적 돌파구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1907년의 헤이그 특사 파견입니다.
만국평화회의란 무엇이었나: 국제 평화의 이상과 제국주의의 현실
제1회 만국평화회의(The First Hague Peace Conference)는 1899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 회의는 전쟁 방지와 군비 축소, 국제 분쟁 해결을 위한 중재 기구 설립 등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26개국이 참가했고, 전쟁의 비인도적 수단을 제한하는 여러 국제법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대체로 유럽 열강 중심의 회의였고, 식민지 국가나 외교권을 상실한 국가의 목소리는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제2회 만국평화회의는 1907년에 같은 장소인 헤이그에서 열렸습니다. 이번엔 참가국이 44개국으로 늘어났고, 국제법의 진전을 위한 논의가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회의도 제국주의적 세계 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에는 마지막 외교적 기회를 모색할 수 있는 작지만 귀중한 틈이었습니다. 일본의 외교권 박탈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이를 무시하고 극비리에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바로 이 사건이 세계사에 길이 남은 헤이그 특사 사건입니다.
헤이그 특사 파견의 전말: 고종의 마지막 몸부림
1907년 고종 황제는 일본의 압박 아래서도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호소하기 위해 세 명의 밀사를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합니다. 이들 특사는 이준, 이상설, 이위종으로, 그들 각각은 법률과 외교, 언론에 능통한 인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헤이그에 도착했고,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전 세계 외교 채널을 동원해 이들의 참가를 강력히 차단했습니다.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외교권을 상실한 보호국이었기 때문에 국제사회는 이들을 합법적인 국가 대표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자 회견, 성명 발표, 국제 인사들과의 면담 등을 통해 일본의 침략 행위와 대한제국의 억울한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이준은 회의장 입장을 거부당한 뒤 극심한 충격과 분노 속에 순국했고,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후에도 러시아와 유럽 각국을 돌며 외교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한국 대표단(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사진이 실린 <Le Courrier de la Conference> 신문 국제 사회의 냉담한 현실: 외면당한 대한의 호소
헤이그 특사 사건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작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유럽 언론은 이들의 활동을 주목했고, 몇몇 지식인은 조선의 사정을 동정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대세는 일본의 손을 들어주는 방향이었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승자의 논리를 바탕으로 미국과 영국의 묵인하에 조선 지배를 합법해가고 있었으며,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미국과 일본의 상호 식민지 인정), 1907년 제2차 영일동맹(영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 등을 통해 외교적 지지를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국제사회는 정의보다는 이해관계를 택했습니다. 고종은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의 분노를 사 퇴위당했고, 이어 순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외교적 실패로 끝났지만, 당시 피식민지국이 국제회의를 통해 목소리를 내려고 시도한 첫 사례 중 하나로, 이후 식민지 해방운동에 중요한 전례가 되었습니다.
세계사 속에서 본 헤이그 특사 사건의 의미
헤이그 특사 사건은 단순한 외교적 해프닝이 아닙니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이는 제국주의 시대의 국제질서가 얼마나 불공정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평화를 이야기하는 국제회의조차 식민지 국가의 존재를 무시하고, 열강의 이해관계만을 조율하는 장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둘째, 대한제국은 비록 외교적 실패를 맛보았지만, 세계사 속에 존재를 각인시키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당시 언론에는 '동양의 작은 나라가 일본의 압제에 저항하며 국제사회에 호소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남았고, 이는 훗날 독립운동의 역사적 자산으로 계승됩니다.
셋째, 헤이그 특사 중 한 사람인 이위종은 유창한 프랑스어와 영어 실력으로 회견을 주도하며 국제 언론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는 단순한 애국심이 아니라 지식과 외교력에 기반한 근대적 애국운동의 표상으로 평가됩니다.
마지막으로, 헤이그 특사 사건은 외교의 힘과 국제 여론의 중요성을 조선이 자각하게 되는 전환점이었습니다. 이는 이후 임시정부의 외교 노선, 상하이 파리강화회의 파견 시도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적 민족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외면당한 정의, 그러나 역사가 기억한 외침
헤이그 특사 사건은 현실 정치의 냉혹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제국주의 열강 속에서 작은 나라의 외침은 쉽게 묵살되었고, 정의는 이익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그 절박한 외침은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에게 영감이 되었고, 말할 수 없는 자의 용기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한 외교 실패로 보기보다는, 대한제국이 스스로 세계사의 주체가 되기 위해 펼친 가장 절박하고도 숭고한 몸부림으로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여전히 현재의 국제사회가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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