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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 근대화의 물꼬를 트다 - 세계사 속 한국사의 교차점
    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22. 18:58

    조선에 발을 디딘 첫 서양인들 - 낯선 문명과의 조우

    조선 근대화 시기, 외국인들이 조선을 처음 방문하게 된 계기는 대부분 우호보다는 충돌에 가까웠다. 19세기 중반, 서양 열강은 동아시아의 문을 강제로 열며 자신들의 상업적, 종교적 이익을 추구했다. 조선 역시 이러한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며 개항(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맞았다. 일본에 이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도 잇따라 통상조약을 체결하며 외국인들의 발걸음이 조선을 향하게 된다.

    이들 외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은 '시간이 멈춘 나라'였다. 미국의 해군 제독 로버트 슈펠트(Robert W. Shufeldt)는 조선의 항구와 거리를 두고 "중세의 한 페이지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라고 표현했다. 영국인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Isabella Bird)는 1894년부터 1897년까지 조선 각지를 여행하며 조선의 자연, 백성들의 생활상, 궁중의 모습 등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녀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당시 서양에서 조선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이 되었으며, 지금도 생생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방인의 눈으로 본 조선 사회 - 아름다움과 낙후의 공존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기록은 조선 사회의 진면목을 다양하게 비추었다. 이사벨라 버드는 조선의 농촌과 백성들에 대해 "어느 곳보다 조용하고 예의 바르며, 근면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라고 극찬했지만, 동시에 "부패한 관료제와 미비한 위생 체계,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은 사회"라고도 지적했다. 그녀의 기록은 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선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한편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은 조선 사회의 질병 문제와 의료 인프라에 주목하였다. 그는 1885년 고종의 허락을 받아 광혜원을 설립하고, 이후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을 운영하였다. 그의 의료 활동은 서양 의학을 조선에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후 근대 의학교육 및 위생 개념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이는 단순한 제국주의적 영향이 아닌, 조선 내부에서 서양 문물의 유용함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실용적 사고가 자라났음을 의미한다.

     

    선교사와 교사, 조선의 교육을 바꾸다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 중 가장 장기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친 집단은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종교 전파를 넘어서 교육과 출판, 의료, 여성 해방 등의 분야에서 조선 사회를 변화시켰다.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남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각각 1885년 조선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선교의 일환으로 교육기관을 설립하였고, 그것이 바로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의 전신)과 배재학당(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의 모태)이다.

    특히 여성 교육의 장을 연 것은 스크랜턴 여사((Mary F. Scranton)였다. 그는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조선 최초의 여학교를 세웠으며, 교육을 통해 여성의 지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주도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여성의 외출조차 자유롭지 못했지만, 이화학당을 졸업한 여성들은 이후 간호, 교육, 출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근대 여성의 역할을 선도하였다.

     

    아펜젤러 선교사와 그의 제자들
    아펜젤러 선교사(우측 맨 뒷줄)와 그의 제자들

     

    근대화의 실질적 자극제, 외국인 기술자와 고문관들

    조선의 근대화는 갑작스레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외국인 기술자들과 고문관들의 존재는 이를 촉진시키는 중요한 외부 동력이었다. 미국인 콜브란(Colbran)은 전차, 전화, 전기 공급 체계 등 당시 서울의 도시기반시설 구축에 기여하였고, 프랑스인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는 대한제국 시기 외교 고문으로서 서구 외교 관례를 조선에 도입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 밖에도 러시아의 의료진, 독일의 군사 고문, 일본의 철도 기술자들이 조선의 근대 국가 건설에 실질적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외국인의 존재는 당시 조선이 겪고 있던 내부 동요와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서, 스스로 현대 국가로 탈바꿈하려는 시도에 적지 않은 자극과 도움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조선과 세계사의 접속점 - 단순한 수동적 수용을 넘어

    조선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조선을 단순히 문명화의 대상으로 보았을지 모르지만, 조선은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갑신정변(1884)과 갑오개혁(1894)은 외세의 영향을 받은 개혁이었지만, 그 속에는 조선 지식인들의 고민과 주체적인 선택이 함께했다. 외국인의 조언과 기술이 도입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식민의 길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선은 세계사적 흐름에 눈을 뜨고, 내부적으로 새로운 정체성과 질서를 모색하는 진통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조선은 세계사 속 전근대의 상징이 아니라 근대와 전통, 주체성과 외세 간의 복잡한 교차점이었다.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과 조선에 남긴 자취는 한국사가 단지 고립된 섬처럼 흘러온 것이 아니라, 세계사 속 다체로운 흐름과 충돌하며 진화해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오늘날 우리가 근대 조선을 돌아보는 것은 한국사와 세계사가 어떻게 만나며 서로를 변화시켰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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