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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과 세계 지리 인식의 변화: 동아시아 변방에서 지구적 시야로 나간 조선 지식인들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9. 08:53
조선 후기, 새로운 세상을 향한 작은 균열
18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이어진 조선 후기, 내부적으로는 세도 정치와 농민 피폐, 외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압박이 점차 거세지며 시대는 격동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조선 사회에는 새로운 사유와 인식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으니 바로 실학(實學)의 등장입니다. 실학은 단지 유학 내부의 사상 분파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유용한 지식을 추구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이는 곧 유교적 가치관에 근거한 세계 인식, 즉 조선 중심, 중화 중심의 질서가 변화의 요구에 직면했다는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실학자들은 경제, 사회, 농업 개혁뿐 아니라, 지리, 역사, 외교, 과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면서 조선 지식 세계의 경계를 넓혀 나갔습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만나는 세계
사실 조선 전기에도 세계를 그려보려는 시도는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1402년(태종 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조선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이자,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지리 인식이 담긴 지도였습니다. 중국, 일본, 인도, 아라비아까지 등장하는 이 지도는 유럽보다도 앞선 시기에 세계를 하나의 화면 안에 담아낸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러나 이 지도는 실제 경험과 탐험이 아닌, 문헌과 전해 들은 정보를 기반으로 제작된 것으로,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고, 조선은 문명국이며, 그 외는 이적이라는 중화 중심의 질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오랫동안 이러한 질서 속에 안주하며 세계를 간접적으로만 인식해 왔습니다.
1402년(태종 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규장각 소장) 실학자들의 각성, 서구 문물로 열린 시야
18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를 통해 서양 선교사들이 전파한 세계지도, 천문학, 수학, 지리학 등이 간접적으로 조선에 소개되기 시작합니다. 실학자들은 이들 문물에 관심을 갖고 수용하려 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의 지리 인식과 세계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이익, 안정복, 박제가, 정약용 등입니다. 이들은 '지구는 둥글다', '서양은 신기한 문명이 있는 곳이다', '조선은 세계 속의 작은 나라일 뿐이다'라는 새로운 관점을 소개하거나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통해 청나라에서 본 서양 기계, 시계지도, 중국과 서양의 문물 차이를 생생하게 기록하며 조선 지식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습니다.
정약용은 서양 천문학 이론과 수학 체계를 탐구하고 이를 자신의 과학 저서에 반영했으며, "서양인은 지구가 둥글다고 하지만 이는 하늘의 모습과도 부합한다"며 기존의 우주론을 재해석하려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조선이 처한 외부 변화에 대한 지식인의 진지한 대응이었습니다.
세계지도와 문명 인식의 재편
이 시기, 조선에 유립된 서양식 세계지도(곤여만국전도)는 기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구조를 완전히 뒤바꾸는 혁신적 사고를 담고 있었습니다. 지구가 둥글고, 아프리카나 유럽이 조선보다 훨씬 크며, 세계는 넓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지도 하나가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림처럼 펼쳐진 이 지도에서, 조선은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닌, '한 구역'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곤여만국전도는 마테오 리치라는 예수회 선교사가 1602년에 중국에 전한 세계지도로, 실학자들을 통해 조선에 소개되었습니다. 특히 홍대용과 김정희 같은 인물들은 이 지도를 통해 세계의 규모를 체감하고, 조선이 더 이상 작은 틀 안에서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이는 근대적 세계 인식으로의 초입이라 할 수 있으며, 조선 후기 지식사회가 단순히 내정과 유교 질서에만 매몰되지 않고, 세계와 조선의 위상을 성찰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징후입니다.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전한 곤여만국전도는 조선의 혼일강리역대국도의 구조를 완전히 뒤바꾸는 혁신적 사고를 담고 있었다. 세계를 향한 시선, 그러나 현실은 한계에 갇히다
이처럼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서구 문물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일부는 조선이 처한 위기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박제가와 같은 인물은 해외 무역과 산업의 중요성, 서양의 군사력과 기술력을 강조하며 '조선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실학자들은 대부분 정치 실권에서 배제된 채, 지방 관직에 머물거나 학문적 논의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보수적 성리학자들은 여전히 외세를 경계했고, 서양은 위협적 존재로 간주되었습니다. 서학(西學)에 대한 박해, 정보 통제, 사대외교 체계의 경직성은 실학의 외연 확장을 가로막았습니다.
결국 조선의 세계 인식은 이론적 차원에서만 일부 진보했을 뿐, 실질적인 정책 변화나 외교 전략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19세기 중엽이 되어, 미국과 프랑스, 일본이 군함을 끌고 조선 해안에 나타났을 때, 조선은 여전히 그들을 이적 혹은 야만의 무리로 인식하며 뚜렷한 외교적 대응을 하지 못한 채 무력 충돌로 치닫게 됩니다.
실학이 남긴 가능성과 오늘의 교훈
비록 실학은 조선의 체제 속에서 제약을 받았고, 조선을 제국주의의 소용돌이로부터 구하지는 못했지만 실학이 던진 문제의식은 분명 조선 지성사의 결정적인 변곡점이었습니다. 이들은 외부 문물을 무작정 수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상황에 맞춰 비판적이고 실용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21세계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화와 글로벌 문명 교류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고, 어떤 시야로 세계를 바라볼 것인지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먼 곳을 향한 시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지적 유산이자 성찰의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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