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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물이 동아시아에 스며들다: 청나라를 거쳐 조선으로 전해진 새로운 세계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8. 18:22
청나라에 유입된 서양 문물: 동서 교류의 물꼬를 트다
청나라에 서양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시점은 17세기 중엽, 곧 강희제와 옹정제, 건륭제 시기를 전후한 때부터입니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을 대상으로 활발한 선교와 문화 교류를 벌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탈리아 출신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입니다. 그는 명나라 말기에 입국해 중국식 의복을 입고 유학을 공부하며 중국식 생활에 철저히 적응함으로써 청나라 조정과의 접촉에 성공합니다.
서양 문물은 주로 선교 활동을 매개로 중국에 들어왔습니다. 과학기술, 천문학, 수학, 지리학, 회화, 음악 등 다방면의 학문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중에서도 특히 서양식 천문학은 중국 조정의 눈에 띄었습니다. 청나라 조정은 선교사들의 천문 역산 능력을 인정해 그들에게 역법 개정과 관측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개인 교사로 삼았고, 그들을 통해 지구본, 망원경, 해시계, 자명종 등 당대 유럽 문명을 대변하는 과학기기를 접했습니다.
이러한 문물은 단순히 수입된 기계나 도구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세계관 자체를 흔들기도 했습니다. 마테오 리치가 전한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는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그리던 전통적인 화이사상에 균열을 일으켰고, 유럽 중심의 세계 질서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창이 되었습니다.
마테오 리치가 전한 <곤여만국전도>(일부) 과학과 천문에서 회화와 음악까지: 청 왕실의 서양 취향
청나라 황실은 서양 문물을 피상적으로 소비한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이해하고 활용했습니다. 특히 건륭제는 궁중 회화에 서양 화법을 도입하여 입체감과 원근법을 활용한 초상화와 풍경화를 제작하게 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중국의 평면적 회화 기법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실제로 중국 고궁박물원(자금성)에는 서양 화가 조르주 카스티글리오네(Giuseppe Castiglione)가 건륭제를 위해 제작힌 궁중화 작품들이 다수 전해집니다. 그는 서양의 유화 기법을 바탕으로 중국적 미감을 조화시켜 독창적인 양식을 완성했습니다. 그 외에도 서양 악기와 음악이 궁중 연주에 도입되었고, 기독교식 천주당(天主堂)이 북경에 세워지는 등 서양 문화가 다양한 층위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처럼 청은 유교 질서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선진 과학과 예술은 실용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융합적 자세를 취했습니다. 물론 그 수용은 제한적이었고, 종교적 확장은 철저히 경계했지만 유럽과의 문물 교류가 청나라 내부의 문명 발전에 기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조르주 카스티글리오네(Giuseppe Castiglione)가 그린 건륭제의 사냥 장면 조선의 반응: 실학자들이 주목한 서양 문물
청나라에서 유입된 서양 문물은 간접적으로 조선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조선은 청에 사신을 보내는 사대 외교의 관례를 통해, 청 조정에서 벌어지는 서양 문물의 수용 상황을 관찰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일부 실학자들이 큰 자극을 받게 됩니다.
특히 18세기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청나라의 문물과 과학 기술, 제도 등을 소개한 책들을 탐독하며 서양 문물에 대한 인식을 넓혀갔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열하일기>를 남긴 박지원은 청의 수도와 주변 지역을 여행하며 서양 천문기기와 과학 기술, 상업 문화를 목격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열하에서 청나라 황제가 서양식 자명종과 천문시계를 사용하는 장면을 자세히 기록하고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비판했습니다.
또 다른 실학자인 홍대용은 천문학과 수학에 특히 관심을 가졌으며, '지전설'과 같은 서양의 과학적 세계관을 수용했습니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기존의 성리학적 천동설을 비판하교, 태양 중심의 헬리오센트릭 모델을 소개하였습니다. 이는 서양 천문학의 영향이 조선의 지식인층에까지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금서와 밀수의 시대: 검열 아래 꽃핀 '은밀한 수용'
하지만 조선 사회는 보수적인 성리학 중심의 질서였기에, 서양 문물의 공개적 수용은 제한적이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가톨릭)가 서양 문물과 함께 유입되면서, 종교적 경계심이 강화되었습니다. 초기 천주교는 실학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학문으로 받아들여졌으나, 곧 유교적 질서를 위협하는 사상으로 간주되며 박해의 대상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 문물과 천주교 서적들은 몰래 복사되거나 밀수되며 지식인 사이에서 은밀하게 공유되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 이승훈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뒤 이러한 서적을 전파하였고, 이는 학문적 갈증을 품은 지식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정약용은 후에 <기예론>, <마과회통> 등에서 서양 과학지식과 의학, 공학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면서 실증적 지식의 중요성을 설파했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씨앗, 전환기의 문명 교류
조선은 서양 문물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청나라를 매개로 서서히 새로운 지식과 관념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실학의 발달, 산업기술에 대한 관심, 세계관의 확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비록 조선은 서양 문물 수용에 있어 청보다 훨씬 느리고 제한적이었으며, 개화기 이전까지는 철저히 보수적인 틀 안에 머물렀지만, 이러한 경험은 훗날 개화기와 대한제국기, 나아가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외부 세계와의 접촉에 대한 지적 기반이 됩니다.
즉 청을 경유한 서양 문물의 수용은 단순한 기술의 전달이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들이 기존의 유교적 세계관을 넘어서 더 넓은 세상으로 시야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문물의 경로를 따라 흐르는 문명의 자극은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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