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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에 잠든 고려불화: 세계 속으로 떠난 문화유산의 여정
    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4. 10:52

    고려불화, 중세 한국 불교미술의 정수

    고려시대(918~1392)의 불화는 한국 불교미술사에서 가장 찬란한 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화란 부처와 보살, 또는 경전 내용을 그린 종교적 그림을 말하며, 고려 불화는 특히 채색이 화려하고 섬세한 필치와 장엄한 구성으로 유명합니다.

    고려불화는 당시의 종교 의례는 물론, 국왕과 귀족의 시주에 의해 제작된 국가적 상징물로서도 기능했습니다. 많은 불화들이 대형 비단천 위에 진채로 제작되었고, 그 내용은 아미타불도, 지장보살도, 수월관음도 등 정토 신앙과 관세음보살 신앙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고려 불교의 사상적 다양성과 대중적 신앙심을 동시에 반영하는 예술이자 한국사 속 회화, 종교, 정치가 융합된 상징적 작품입니다. 

    그런 고려불화의 걸작들이 지금은 유럽의 박물관과 미술관에 다수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상황을 넘어 세계사 속 문화재 이동과 교류의 역사를 반추하게 합니다. 

     

    고려불화
    고려불화는 한국 불교미술사에서 가장 찬란한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일본 센주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불화(아미타삼존불)

     

    유럽에 소장된 고려불화, 어디서 어떻게 갔을까?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20점 남짓한 고려불화가 유럽 주요 기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곳을 들 수 있습니다.

    - 프랑스 기메 동양박물관: 아미타불도, 수월관음도 등 고려 후기 불화 3점 이상 

    - 독일 베를린 인도박물관: 19세기 말 수집된 고려불화 2점

    - 영국 대영박물관: 20세기 초 수집된 아미타삼존도

    - 이탈리아 로마 동양 예술관, 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물관 등지에도 고려불화 또는 조선 초기 불화가 존재

    이들 대부분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사이,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수집가들에 의해 구입되거나 전시 목적으로 유출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특히 불교미술에 매혹된 유럽 선교사, 미술상, 민간 수집가들이 한반도와 일본을 경유해 고려불화를 입수한 경우가 많으며, 이 과정에서 작품의 출처나 입수 경로가 불분명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일부는 일제강점기 중 일본인 수집가들이 반출해 유럽으로 넘긴 케이스, 혹은 서양 외교관들이 외교 선물 또는 개인 기념품 형식으로 소장한 사례도 존재합니다.

     

    세계사 속 문화유산의 이동, 교류인가 탈취인가?

    고려불화가 유럽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고려불화의 예술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증명한다는 점입니다. 프랑스 기메박물관은 고려불화를 '동아시아 불교회화의 절정기 작품'으로 평가하고 이으며, 독일과 영국의 동양미술 컬렉션에서도 가장 귀중한 동아시아 미술품 중 하나로 전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문화재들이 정당한 절차 없이 본국을 떠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문화재 반환 논의의 사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엘긴 마블(그리스-> 영국), 로제타석(이집트->영국), 베냉 청동(나이지리아->유럽) 등의 사례처럼 많은 문화유산들이 제국주의 시기 정복, 약탈, 상업적 착취를 통해 유출되었습니다. 고려불화 역시 전쟁, 침탈, 외교관의 무단 반출 등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고, 이로 인해 정당성 여부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며, 국제사회에서 반환 요구가 점점 확대되고 있습니다.

     

    고려불화의 귀환을 넘어 세계적 가치의 공유로

    한국은 최근 수년간 프랑스, 일본, 미국 등과 협력하여 유출 문화재의 환수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일부 고려불화도 민간의 기증, 국가 간 협약, 장기 대여 방식으로 돌아오거나 복원되고 있으며, 동시에 유럽에 소장된 고려불화를 세계 시민들과 함께 감상하고 공동의 문화유산으로 공유하는 시도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는 소유나 공유냐, 환수냐 협력이냐의 이분법을 넘어, 문화유산이 인류 전체의 정체성과 기억의 일부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고려불화의 가치를 한국사뿐 아니라 세계사 속에서 정당하게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고려불화는 단지 종교 회화가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 국제 교류의 증거, 예술과 신앙이 결합된 문명의 산물이며, 그 이동 경로 자체가 한반도가 세계와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언이기도 합니다.

     

    세계 속의 고려불화, 사라진 것이 아닌 이어져야 할 기억

    고려불화는 지금도 유럽의 박물관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빛은 단지 작품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이 떠나온 시간, 장소, 기억, 그것을 다시 찾으려는 사람들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고려불화를 단지 반환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세계사 속 문화재 이동의 맥락에서 깊이 이해하고, 그 위에서 새롭게 연결하고 공유할 방법을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고려불화는 여전히 세계를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기억이며 미래를 향한 문화적 다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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