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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암각화의 흐름 속에서 본 반구대 암각화의 위상
    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4. 16:06

    반구대 암각화, 태화강에서 되살아난 선사 시대의 이야기

    반구대 암각화는 경상북도 울주군 태화강변의 암벽에 새겨진 선사 시대 유물로, 한국은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고대의 걸작입니다. 이 암각화는 약 7천 년 전부터 새겨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고래, 사슴, 호랑이, 배 등이 다양한 동물과 인간의 형상이 등장합니다. 반구대라는 이름은 암벽이 마치 엎드려 있는 거북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실제로 이 작은 바위 벽화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 인류 문화의 시작을 말없이 증명해주는 역사적 증언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사에서는 신석기 후기부터 청동기 초기에 이르는 인간의 삶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되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도 반구대 암각화는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인류의 감각과 사고 체계를 보여주는 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암각화의 흐름과 비교되는 반구대의 독창성

    세계에는 수많은 암각화 유적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는 기원전 약 18,000년 전에 그려졌으며,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인도의 비마벳카 암각화, 호주의 무루주구강 유역 암각화 등도 그 지역 선사인의 감성과 세계관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암각화는 동굴 안쪽이나 건조한 기후대에 위치해 있으며, 회화적인 성격이 강하거나 종교적 제의의 흔적으로 해석됩니다. 이와 달리 반구대 암각화는 한국 동남부의 강변, 그것도 태화강 상류의 범람 구역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이례적입니다.

    더욱 주목할 점은 반구대 암각화가 단순한 사냥 기록이나 신앙의 도상이 아닌, 고래잡이를 비롯한 해양 활동의 구체적 장면들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고대 동북아시아 해양문화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장 오래된 시각자료이며, 인간이 고래처럼 거대한 포유류를 집단지성으로 사냥한 최초의 문명 흔적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특히 작살이 박힌 고래의 형상이나 배에 탄 사람들의 모습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사실적 묘사의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생활의 '실감'을 전하는 암각화는 세계적으로도 드뭅니다.

     

    울산 태화강 반구대 암각화
    태화강 상류의 범람 구역 바위에 그려진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잡이를 비롯한 해양 활동의 구체적 장면들을 묘사하고 있다.

     

    문자 이전의 기록 방식, 암각화가 문명을 전하다

    암각화는 문자 이전 시대의 기록 매체였습니다. 인류는 아직 문자를 갖추기 이전, 즉 구술 언어로만 정보를 전달하던 시대에도 그들의 경험, 신앙, 감정, 공동체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이러한 '이미지 문명'의 결정체로,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생생하게 과거를 이야기합니다. 반구대에 새겨진 수백 마리의 동물 형상, 그것도 단순 묘사가 아닌 움직임과 관계성이 표현된 형상들은 인류 초기의 상징 능력과 미적 감각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고래는 한 방향으로 이동하고, 고래를 둘러싸고 배와 작살이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이 모든 요소는 하나의 이야기, 즉 사냥하는 장면을 이루고 있으며, 이는 시간성과 서사성을 갖는 구성입니다. 고대인이 시각언어를 통해 특정 사건과 공동체의 삶을 후세에 전하려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이러한 점에서 반구대 암각화는 인류 최초의 만화적 기록 혹은 다큐멘터리로 볼 수도 있습니다.

     

    기후 위기와 문화유산 보존, 반구대가 직면한 세계적 과제

    그러나 오늘날 반구대 암각화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바로 태화강 상류에 물이 차오르면 암각화가 물에 잠겨 풍화와 침식을 반복적으로 겪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단지 울산시의 지역적 이슈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와 수자원 개발로 인해 문화유산이 사라지고 있는 보편적 상황을 대변합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암각화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반구대의 보존 문제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계의 여러 암각화 유적지들 역시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아프리카 남부의 드라켄스버그산맥의 암각화, 호주의 버루알라 암각화 등은 개발과 기후 변화로 인해 훼손되고 있으며, 이를 복원하고 보존하는 데 세계적인 공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이러한 보존 윤리와 과학 기술의 시험대이기도 합니다. 디지털 복원, 3D 스캐닝 기술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반구대 암각화를 영구적으로 기록하고 연구하려는 노력은 인류 전체가 공유해야 할 과제임을 보여줍니다.

     

    인류 공동의 기억, 반구대 암각화의 세계사적 가치

    반구대 암각화는 한반도 남쪽 강가에 있는 고대인의 흔적이지만, 그 메시지는 한민족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인간이 공동체로 살아가며 자연과 맞서고, 이해하고, 공존하려 했던 고대인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이 암각화는 수천 년 전 바닷가 사람들의 이야기이면서도 지금 이 시대의 우리에게 지속 가능한 삶과 문화의 의미를 다시 묻고 있습니다.

    반구대 암각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제 한국사에서 세계사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고대 동북아 해양활동의 증거이자 전 세계 암각화 중 가장 구체적이고 역동적으로 이야기화한 유산으로, 인류의 시각적 사고가 어떻게 문명으로 진화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열쇠입니다.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으로서 반구대 암각화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야 마땅하며, 그것을 위해 세계의 많은 이들이 함께 보존과 연구의 길에 나서야 할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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