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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속 술라: 독재관을 통해 본 공화정의 몰락로마사 2025. 9. 20. 06:32
로마사와 술라의 등장: 내전과 권력 다툼의 시대
로마사에서 술라(Lucius Cornelius Sulla)는 공화정 말기 가장 논쟁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기원전 2세기 말, 로마는 지중해 패권을 차지한 대제국으로 성장했으나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균열에 시달렸다. 정복 전쟁의 전리품은 원로원 귀족과 신흥 지주에게 집중되었고, 소농민은 몰락해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했다. 또한 이탈리아 동맹시들은 로마 시민권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켰다. 이러한 불안정 속에서 마리우스와 술라 같은 장군들이 정치 무대에 오르며 군사력이 정치 권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열렸다. 술라는 귀족 가문 출신이지만, 젊은 시절은 가난하게 보냈고, 전장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출세했다. 특히 유구르타 전쟁과 동방 원정에서 군사적 능력을 입증하면서 원로원과 귀족층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앞길에는 이미 대중적 지지를 확보한 마리우스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고, 두 사람의 대립은 단순한 개인적 갈등을 넘어 로마 공화정의 근본을 흔드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로마사에서 술라는 공화정 말기 가장 논쟁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로마사와 술라의 독재관: 제도 개혁인가, 권력 농단인가
술라는 권력을 잡은 뒤 스스로를 독재관(dictator)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의 독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임시적 권한이 아니라 사실상 무제한적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형태였다. 그는 원로원의 권위를 대폭 강화하고, 민회의 입법 가능을 축소시켰다. 또한 호민관의 권한을 제한하여 평민의 정치적 목소리를 약화시켰다. 속주 총독의 임기를 늘리고, 법정 권한을 재편해 귀족 중시의 통치를 제도화하려 했다. 흥미로운 점은 술라가 단순한 폭군이 아니라 나름의 공화정 보존자를 자처했다는 것이다. 그는 로마의 무정부 상태와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강력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믿었으며, 장군들이 제멋대로 권력을 쥐는 상황을 방지하고자 했다. 예컨대 장군이 임무를 마치기 전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귀환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 법은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규제였다. 하지만 그가 군대를 끌고 로마에 들어온 첫 번째 인물이었기에, 이 법은 이미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 술라의 개혁은 귀족적 질서를 회복하려는 의도였으나, 그의 폭력적 방식 때문에 후대에는 '권력을 독점하려는 자기합리화'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로마사와 술라의 은퇴: 전례 없는 권력의 자진 포기
로마사에서 술라가 유일무이한 점은, 권력의 정점에 오른 뒤 스스로 내려놓았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79년, 그는 독재관에서 물러나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고 고향에서 여행을 보냈다. 이는 후대의 카이사르나 옥타비아누스와 뚜렷이 대비되는 부분이다. 술라는 자신이 만든 제도가 충분히 공화정을 안정시킬 것이라 믿었기에 떠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의 은퇴 직후 로마 정치는 다시 혼란에 빠졌고, 그의 법들은 점차 무력화되었다. 그는 사생활에서 호화로운 삶을 즐겼고, 은퇴 후에도 권력자답게 존중을 받았지만, 정치적 유산은 오래가지 못했다. 술라의 자친 은퇴는 한편으로는 냉정한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이미 적대 세력이 제거된 상황에서 더 이상의 권력 유지가 불필요했고, 동시에 건강 악화로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죽기 전 회고록을 남겼는데, 그 속에서 자신은 '행운을 받은 자(Felix)'라 칭했다. 하지만 그의 행운은 로마 공화정 전체에는 불행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의 역설로 남았다.
로마사와 술라의 유산 공화정 몰락의 전주곡
로마사에서 술라의 독재관은 이후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군단을 동원한 정치 개입이라는 전례를 남김으로써,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같은 후대 장군들이 이를 모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의 '친정자 명단'은 정치적 폭력을 합법화했고, 로마 사회의 도덕적 기반을 붕괴시켰다. 또한 귀족 중심으로 권력을 재편하려던 개혁은 평민과 신흥 세력의 불만을 더욱 자극하여 새로운 갈등을 불러왔다. 술라는 스스로를 공화정의 수호자로 인식했으나, 사실상 공화정의 파괴자가 되었다. 그의 개혁은 귀족적 이상을 복원하려 했지만, 이미 사회 구조와 권력 역학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결국 술라가 남긴 것은 제도는 취약하고, 뮤력운 절대적이라는 냉혹한 교훈이었다. 그의 시대는 공화정의 몰락을 알리는 전주곡이자 제정으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비극적 무대였다. 오늘날 우리가 술라의 독재를 되새기는 이유는 권력이 제도의 틀을 벗어나 개인의 손에 집중될 때 어떤 파국이 닥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로마 공화정의 몰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술라라는 인물의 실험은 그 몰락을 돌이킬 수 없는 궤도에 올려놓는 결정적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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