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로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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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트라야누스와 황금기 제국: 최대 영토의 주인은 누구였나로마사 2025. 8. 31. 23:46
로마사와 트라야누스의 즉위: 황금기의 서막로마사는 수많은 황제의 흥망과 함께 굴곡진 역사를 보여주지만, 황금기라는 칭호를 가장 자주 받는 시기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였다. 네르바 황제가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제위에 오른 트라야누스(재위 98~117년)는 군인 출신으로, 로마사상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였다. 그는 이베리아반도의 히스파니아 출신으로, 로마가 정복을 통해 포용한 지방에서 성장해 중앙 권력의 정점에 오른 사례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트라야누스의 즉위는 단순한 황제 교체가 아니라, 로마 제국이 새로운 정치적 균형을 모색하는 과정의 결정판이었다. 그는 군사적 재능과 행정적 통찰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원로원과의 협력을 통해 내정을 안정시키는 한편, 정복 전쟁을 주도하며 영토 확장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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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로 읽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팍스로마나를 향한 서막로마사 2025. 8. 24. 14:30
로마사와 카이사르의 야망: 갈리아로 향한 발걸음로마사에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은 단순한 정복 전쟁이 아니라,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넘어 유럽 대륙으로 확장해 가는 문을 연 사건이었다. 기원전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을 무대로 8년간의 전쟁을 벌였는데, 이는 그가 단순히 장군으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한 전투가 아니라 로마 정치의 판을 뒤흔들려는 의도적 행보였다. 당시 로마 공화정은 원로원 귀족파(Optimates)와 민중파(Populares)의 대립으로 불안정했고,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대표적 인물로서 권력 기반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갈리아는 오늘날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일부, 북이탈리아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수많은 부족들이 경쟁과 동맹을 반복하며 살아가던 곳이었다. 로마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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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아우구스투스의 길: 공화정의 유산 위에 세운 첫 제국로마사 2025. 8. 15. 18:08
로마사, 공화정의 종말과 젊은 옥타비아누스의 등장로마사는 공화정의 정치 이상이 무너지고 새로운 권력 구조가 탄생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 회의장에서 암살당하자 로마 정치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그의 양자이자 후계자로 지명된 젊은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스무 살에 불과했지만, 냉철한 판단과 정치 감각으로 권력의 중심에 천천히 다가섰다. 옥타비아누스는 처음에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구성해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고, 특히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결탁한 안토니우스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전쟁으로 치달았다. 이 과정에서 옥타비아누스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여론전에서도 우위를 점하며 로마 시민들에게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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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악티움 해전에서 갈라진 제국의 운명: 옥타비아누스 vs 안토니우스의 최후 대결로마사 2025. 8. 8. 10:24
로마사, 제국의 향방을 가른 해전의 서막로마사는 단순한 승자와 패자의 기록이 아니라, 권력과 운명, 이상이 충돌한 격변의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악티움 해전(Battle of Actium)은 단순한 해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해전은 기원전 31년 9월 2일, 그리스 서부 해안 악티움에서 벌어진 옥타비아누스(후일 아우구스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7세가 이끄는 연합군 사이의 운명을 건 대결이었다. 이 전투는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숨결과도 같았고, 제정 로마의 서막을 여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악티움 해전의 배경에는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시작된 권력의 공백이 있었다.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로마는 제2차 삼두정치로 돌입했으며,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권력을 나눠 가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