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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사, 트라야누스와 황금기 제국: 최대 영토의 주인은 누구였나
    로마사 2025. 8. 31. 23:46

    로마사와 트라야누스의 즉위: 황금기의 서막

    로마사는 수많은 황제의 흥망과 함께 굴곡진 역사를 보여주지만, 황금기라는 칭호를 가장 자주 받는 시기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였다. 네르바 황제가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제위에 오른 트라야누스(재위 98~117년)는 군인 출신으로, 로마사상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였다. 그는 이베리아반도의 히스파니아 출신으로, 로마가 정복을 통해 포용한 지방에서 성장해 중앙 권력의 정점에 오른 사례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트라야누스의 즉위는 단순한 황제 교체가 아니라, 로마 제국이 새로운 정치적 균형을 모색하는 과정의 결정판이었다. 그는 군사적 재능과 행정적 통찰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원로원과의 협력을 통해 내정을 안정시키는 한편, 정복 전쟁을 주도하며 영토 확장에 성공했다. 로마사에서 최대 판도의 제국을 완성한 인물이 바로 트라야누스였던 것이다.

    트라야누스는 즉위 직후부터 최선의 황제라 불리며 시민과 원로원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는 독재적 구너력을 휘두른 도미티아누스와 대비되는 정치적 행보 덕분이었다. 그는 원로원과 권력을 나누는 모습을 보이며 정통성과 합법성을 강화했고, 동시에 군단을 장악하여 팍스로마나의 이상을 확고히 했다. 황제의 권력은 개인적 카리스마뿐 아니라 제국이라는 시스템의 안정을 토대로 한 것이었고, 이는 로마사가 보여주는 통치의 교훈 중 하나로 평가된다.

     

    로마사와 타키아 전쟁: 황금기를 연 정복 전쟁

    로마사는 전쟁과 정복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트라야누스 치세의 다키아 전쟁은 로마 제국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꼽힌다. 다키아는 오늘날 루마니아 지역에 해당하며, 카르파티아 산맥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왕국이었다. 이곳은 천연자원이 풍부했고, 특히 금광으로 유명했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를 굴복시킴으로써 로마 경제를 장기간 뒷받침할 부를 확보하고자 했다.

    101년부터 시작된 제1차 다키아 전쟁에서 트라야누스는 군단을 이끌고 도나우강을 넘어 격전을 치렀고, 결국 106년 제2차 전쟁을 통해 다키아를 완전히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쟁의 결과는 단순한 영토 확장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다키아는 로마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었으며, 로마는 그곳의 금과 은을 통해 군사와 공공사업을 지원할 막대한 재정을 얻게 되었다. 또한 다키아의 로마화 과정은 제국이 정복지를 닪순히 지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도와 문화를 이식하여 장기적 통합을 추구했음을 잘 보여준다.

    로마사에 기록된 트라야누스 기둥은 다키아 전쟁을 기념하는 대표적 기념물이다. 이 기둥은 전투 장면을 정교하게 새긴 부조로 가득 차 있으며, 오늘날까지 로마 군사사의 생생한 교재 역할을 하고 있다. 트라야누스는 단순히 정복자에 머무르지 않고, 정복의 영광을 도시와 시민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다키아에서 흘러나온 황금은 로마 시내의 공공목역탕, 도로, 수도교 건설에 사용되었고, 이는 로마 시민들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렸다. 그 결과 트라야누스는 시민을 위하는 황제라는 명성을 확고히 하게 된다.  

     

    로마사에 기록된 트라야누스 기둥은 다키아 전쟁을 기념하는 대표적 기념물이다.
    로마사에 기록된 트라야누스 기둥은 다키아 전쟁을 기념하는 대표적 기념물이다.

     

    로마사와 최대 판도의 제국: 동방 원정과 한계

    로마사는 제국의 확장을 통해 영광을 얻었으나, 동시에 한계와 위험도 내포하고 있었다. 다키아 정복 이후 트라야누스는 동방으로 시선을 돌려 파르티아 제국과의 대결에 나섰다. 당시 파르티아는 서아시아에서 로마에 맞설 유일한 강국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둘러싼 갈등은 수십 년간 이어져 왔다. 트라야누스는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원정을 감행했다.

    114년 그는 대군을 이끌고 동방으로 진격해 아르메니아를 합병하고,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심지어 바빌론과 페르시아만 인근까지 진출하면서 로마 제국은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때 로마는 북서쪽으로는 브리타니아, 남쪽으로는 사하라,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이루었고, 이는 로마사의 정점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은 동시에 제국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광대한 영토는 통치와 군수 보급에 엄청난 부담을 안겼고, 현지의 반란과 저항도 거셌다. 특히 유대 지역에서 일어난 대뮤모 반란은 로마 군단을 소모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트라야누스는 원정 도중 병에 걸려 117년 셀리누스(오늘날 터키 지역)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지나치게 넓어진 제국의 국경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동방에서 일부를 철수했다. 결과적으로 트라야누스가 남긴 최대 영토는 단기간의 정점에 불과했지만, 그 상징성은 로마사가 지닌 팽창의 욕망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로마사와 트라야누스의 유산: 황금기의 의미

    로마사는 트라야누스를 '옵티무스 프린켑스(최선의 황제)'라 기록한다. 그의 통치가 특별했던 이유는 단순히 전쟁의 승리에 있지 않았다. 다키아 정복으로 얻은 재원을 시민들에게 환원하여 로마의 공공사업을 발전시켰고, 원로원과 협력하여 정치를 운영하며 독재적 권력을 정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그는 황제의 존재 이유를 시민의 복지와 제국의 번영에서 찾으려 했다. 이는 로마사가 보여주는 이상적 통치자의 모델로, 후대 황제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트라야누스 사후에도 그의 명성은 이어졌다. 후대의 원로원은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트라야누스만큼 행운아이고 아우구수투수만틈 존경받기를'이라는 축복을 바쳤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의 창시자로서 존경받았고, 트라야누스가 황금기의 구현자로서 이상적인 통치자상을 보여주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트리야누스 치세를 다누순하 최대 영토의 제국이라는 군사적 성취로만 볼 수 없다. 그의 시대는 로마가 정복과 통합을 통해 하나의 세계 질서를 구현하려 했던 실험의 정점이자 제국이 누릴 수 있는 부와 복지의 이상적 균형을 경험한 시기였다,. 물론 지나친 팽창은 제국을 압박했고, 이후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시대에 이르러 안정과 수축이 선택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의 황금기는 로마사가 남긴 제국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집약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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