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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 아우구스투스의 길: 공화정의 유산 위에 세운 첫 제국로마사 2025. 8. 15. 18:08
로마사, 공화정의 종말과 젊은 옥타비아누스의 등장
로마사는 공화정의 정치 이상이 무너지고 새로운 권력 구조가 탄생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 회의장에서 암살당하자 로마 정치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그의 양자이자 후계자로 지명된 젊은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스무 살에 불과했지만, 냉철한 판단과 정치 감각으로 권력의 중심에 천천히 다가섰다. 옥타비아누스는 처음에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구성해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고, 특히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결탁한 안토니우스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전쟁으로 치달았다. 이 과정에서 옥타비아누스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여론전에서도 우위를 점하며 로마 시민들에게 '공화정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로마사, 아우구스투스의 길. 왼쪽에서 두 번째가 아우구스투스 로마사, 악티움 해전과 권력 독점의 길
로마사의 전환점 중 하나인 악티움 해전(기원전 31년)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유일한 권력자로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그리스 서부 해안에서 벌어진 이 해전에서 그의 함대는 아그리파 장군의 지휘 아래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완전히 격파했다. 패배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주했지만, 결국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이 승리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전역과 속주를 장악했으며, 정치적 경쟁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왕이나 독재자라는 칭호를 취하지 않았다. 로마 시민들이 왕정 복귀를 극도로 혐오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겉으로는 공화정 제도를 존중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군사와 행정, 재정을 모두 장악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훗날 프틴키파투스(Princeps 체제)라 불리는 제정 초기의 정치 구조로 이어졌다.
로마사,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과 새로운 정치 질서
로마사는 기원전 21년 1월,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부여하면서 제정 시대의 서막을 알린다. 그는 프린켑스(제1시민)라는 겸손한 직함을 사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모든 국가 권력을 한 손에 쥔 황제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치밀한 개혁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제도화했다. 군제 개혁으로 상비군과 황실 근위대(프라이토리안 가드)를 창설하여 충성심을 확보했고, 속주를 황제 직할과 원로원 관할로 나누어 권력 균형을 가장한 통제를 실시했다. 세제 개편과 도로, 항만 정비는 경제를 안정시켰고, 식령 공급 제도를 개선해 도시 민심을 얻었다. 그는 또한 로마의 도덕 회복을 내세우며, 결혼 장려, 간통 처벌 강화 등 사회 규범을 재정비했다. 이러한 조치는 단순한 행정 개혁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가치와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작업이었다.
로마사, 아우구스투스의 이미지 정치와 대중 설득 전략
로마사는 아우구스투스가 군사력 못지않게 이미지 정치를 능숙하게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을 폭군이 아닌 공화정의 회복자로 포장하기 위해 예술과 건축, 화폐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로마 곳곳에 세운 신전과 개선문은 그의 승리를 기념함과 동시에 로마의 평화를 상징했다. 특히 '아라 파키스(평화의 제단)'는 그가 가져온 번영과 안정을 시각적으로 각인시킨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는 화폐에 자신의 얼굴을 세겨 권위를 널리 알렸지만, 동시에 카이사르처럼 신격화된 왕이 아니라 제1시민이라는 메시지를 함께 담았다. 또한 문학가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에게 집필을 후원하여, 자신의 통치를 신화적 기원과 연결시키는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켰다. 이를 통해 그는 무력으로 얻은 권력을 문화와 상징의 힘으로 정당화했고, 대중의 기억 속에 '로마의 황금시대를 연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로마사,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유산과 제정의 확립
로마사는 아우구스투스 치세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시작으로 기록한다. 그의 40여 년 통치는 내전으로 피폐해진 로마 세계에 장기간의 평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 평화는 군사력과 권력 집중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에, 공화정의 자유와는 양립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의 세습 가능성을 열어두었고, 황제권을 부드럽게 후계자들에게 넘길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로써 로마 제정은 일시적 권력 집중이 아닌, 지속 가능한 정치 체제로 자리 잡았다. 그는 사후에도 신격화되어 '신 아우구스투스'로 숭배받았으며, 후대 황제들은 그의 정치 스타일과 이미지 조작 전략을 모범으로 삼았다.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로마 세계가 300년 넘게 유지할 수 있었던 제국의 정치적 틀을 완성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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