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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황제, 네로는 진짜 미친 독재자였을까?로마사 2025. 7. 31. 18:53
로마사 속 '광기'의 상징, 네로의 악명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로마사에 네로 황제는 '미친 독재자'의 전형처럼 회자된다.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살해하고, 아내를 죽인 후 그녀와 닮은 소년을 거세해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무엇보다도 64년 로마 대화재 당시, 불길 속에서 리라를 켜며 시를 읊었다는 전설은 그를 '광기 어린 폭군'으로 각인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기록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후대의 과장이었을까?
당대 역사 기록의 대부분은 네로를 싫어했던 원로원 귀족 계층과 기독교인들에 의해 쓰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평가를 신중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는 네로를 비난하며 그를 부도덕하고 사악한 인물로 묘사했지만, 이들 역시 네로가 자살한 이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그의 전기를 집필했다. 따라서 이들의 기록에는 정치적 의도가 섞여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로마사: 네로 황제와 콜로세움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로마사에서 되짚어보는 네로의 실제 정책들: 폭군인가, 개혁가인가
로마사에서 네로를 단순히 '광인'으로 단정짓기에는 그의 치세 중 추진된 정책들이 매우 이례적으로 진보적이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로마 귀족 중심의 권력 구조를 탈피하려 했고, 헬레니즘 예술을 옹호하며 제국 전반에 걸쳐 문화적 개방을 꾀했다. 도시 빈민들을 위한 목욕 시설과 상수도 건설, 노예들의 인권 보호를 위한 법안 제안은 당대 기준으로는 파격적이었다.
특히 그는 서민과 동방 출신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원로원 중심의 기득권 체제에 도전하는 인물로 기능했다. 네로의 개혁은 상류층에겐 위협이 되었고, 그의 인기와 예술에 대한 집착은 귀족들에게는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로 치면 '포퓰리스트' 혹은 '문화정책에 집중한 개혁가'라는 시선도 가능하다.
로마사에 기록된 대화재의 진실과 네로의 억울함
로마사에서 가장 극적으로 묘사되는 사건 증 하나가 바로 64년의 대화재다. 많은 이들이 네로가 의도적으로 불을 질렀다고 믿지만, 정작 당시 네로는 로마에 없었으며 불이 번지자 서둘러 귀환해 구호 조치를 취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궁전 일부를 개방해 이재민을 수용했고, 재건 과정에서 최초의 도시계획을 도입해 방화 방지책을 강구했다.
문제는 그가 대화재 이후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는 분명히 정치적 폭력이었고, 로마사에서도 그가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희생시켰다는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반대로, 대화재의 원인 제공자로 그 자신이 지목될 위험이 컸다는 점에서 이는 자가방어의 수단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무엇보다도 당시 기독교는 로마 사회 내에서 이미 '의심받는 집단'이었다는 점이 네로에게 정치적 핑곗거리를 제공했을 것이다.
로마사에서 다시 바라보는 네로: 역사인가, 신화인가
로마사에서 네로는 늘 '폭군'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로 소비되어 왔다. 그로나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은 점점 더 신중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의 음악 활동, 예술 후원, 도시계획, 제국의 외교 정책은 당시 기준으로는 혁신적이었으며, 오히려 후대 황제들이 모방하려 했던 사례들도 있다. 심지어 사후 1세기 후, 동방 제국 지역에서는 네로가 살아 돌아올 것이라는 '네로 부활신앙'까지 퍼졌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네로는 단순한 폭군이 아닌 정치적 희생양이자 시대를 앞서간 개혁 군주였을 가능성도 있다. 로마사는 때로 승자의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패자의 진실은 사라지거나 왜곡되기 쉽다. 네로에 대한 평가는 이제 '광기와 예술', '폭력과 개혁'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할 시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친 황제'라는 자극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역사적 이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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