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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죽음: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브루투스의 칼끝
    로마사 2025. 7. 28. 14:33

    로마사 최후의 칼날: 카이사르를 찌른 브루투스는 배신자였나 영웅이었나?

    로마사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은 단순한 한 정치인의 죽음이 아니라, 공화정의 몰락과 제정의 서막을 알리는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특히 이 사건에서 가장 극적인 인물은 카이사르를 찌른 23인의 원로원 의원들 가운데 한 명, 브루투스다. 단지 참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카이사르의 절친한 동료이자 사실상 '정치적 아들'로 여겨졌다는 점에서 그의 칼끝은 곧 배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과연 브루투스는 로마 공화정을 파괴한 배신자였을까? 아니면 공화정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호자였을까? 이 질문은 로마사를 단순히 외워야 할 연대의 흐름이 아닌, 오늘날에도 유효한 정치적 딜레마로 되살려준다.

    고대 로마사에서 브루투스는 공화정의 이상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주 등장한다. 로마 공화정은 왕정을 몰아낸 뒤 권력을 분산시키는 구조로 국가를 운영했고, 그 체제 아래에서 브루투스는 귀족 중심의 정치 이념에 충실한 원로원파의 일원이었다. 카이사르가 '종신독재관(Dictator perpetuo)'으로 임명되고, 그의 이름으로 조각상과 신전이 세워질 즈음, 브루투스는 카이사르가 왕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품었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야심이 아니라 로마인 전통에 대한 깊은 충돌이자, 자유를 지키고자 한 철학적 행동이었다고도 해석된다. 그렇기에 그는 'Sic semper tyrannis!(폭군은 이와 같이 죽는다)"라는 라틴어 선언 아래, 역사적 폭력을 감행했던 것이다.

     

    로마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죽음: 카이사르의 죽음과 브루투스의 칼끝
    로마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죽음: 카이사르의 죽음과 브루투스의 칼끝

     

    로마사에서 공화정은 이상이었는가, 현실이었는가

    로마사에서 공화정은 종종 이상화되어 그려지지만, 현실 속 공화정 말기의 로마는 귀족 간의 분열, 부정부패, 무장 정치가 판을 치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비롯한 암살자들은 '옛 공화정'의 회복을 꿈꾸었으나, 실상 로마는 이미 귀족의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민중은 오히려 카이사르의 개혁정책에 열광하고 있었다. 브루투스의 칼이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기득권 귀족들의 '자기 권리'를 위한 자유였던 셈이다. 고대 로마의 민중은 이미 원로원보다는 카이사르를 더 신뢰하고 있었으며, 이는 그가 죽은 뒤 벌어진 대중들의 격렬한 시위와 화형으로 증명되었다.

    또한 로마의 공화정 말기에는 정치 구조 자체가 붕괴 직전에 있었으며, 공화정을 유지하기 위한 실질적인 역량이나 제도적 방어 장치가 부재했다. 브루투스의 행동은 이상적이었을지 몰라도 전략적으로는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그는 카이사르만 제거하면 공화정이 자동으로 부활할 것이라 믿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그 죽음은 옥타비아누스(후일 아우구스투스)에게 정치적 명분을 안겨주었고, 내전의 도화선이 되어 결국 제정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브루투스의 '공화정 수호'가 오히려 공화정의 종언을 불러왔다는 데 있다.

     

    마사에서 브루투스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 

    로마사에서 브루투스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정치적 맥락에 따라 극적으로 변해왔다. 고대 로마 당시에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기도 했지만, 동시에 스토아 철학의 실천자로서의 이미지도 강하게 남아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단테가 <신곡>에서 브루투스를 지옥 최하층에 떨어뜨리며 가장 큰 배신자로 간주했으나,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시대에는 오히려 '폭군을 처단한 자유의 영웅'으로 재조명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줄리어스 시저>에서 그를 복잡하고 고뇌에 찬 인간으로 그려내며, 독자들로 하여금 '배신과 충성의 경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했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브루투스의 행동을 공화주의적 급진주의, 혹은 실천적 윤리의 상징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마키아벨리조차도 <로마사 논고>에서 브루투스의 결단을 높게 평가하며, "공화정은 폭군의 피 없이 복원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이처럼 로마사에서 브루투스는 단순한 반역자가 아니라, '역사의 도덕적 딜레마'를 상징하는 인물로 작용한다. 그의 칼끝은 단순한 정치적 암살이 아니라, 체제 전환기에서 인간이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로마사에서 제정의 시작과 브루투스 이후의 그림자

    로마사에서 브루투스의 죽음 이후, 로마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공화정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의 죽음은 또 다른 내전을 촉발했고,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무너뜨리고 단독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제정 로마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로 즉위하는 계기를 마랸했다. 브루투스가 지키고자 했던 이상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현실 정치의 흐름은 힘과 권력의 집중으로 이동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사에서 브루투스의 칼은 공화정의 부활이 아닌, 제정의 정당화 도구로 작용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브루투스를 단순히 실패한 이상주의자나 비극적 영웅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그는 공화정이라는 이상을 실제로 실현하려 했고, 자신의 정치적 유불리를 넘어 '로마를 위한 결단'을 내렸다는 점에서 단순한 야심가들과는 구별된다. 오늘날 우리가 브루투스를 평가할 때, 그것은 단순히 로마사를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권력과 이상,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긴장 관계를 되짚어보는 행위이기도 하다. 결국 그는 배신자이기 이전에, 시대가 감당할 수 없었던 철학자적 정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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