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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속 한국사: 서양 종교 가톨릭이 동아시아에 닿기까지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6. 20:34
서양 종교 가톨릭, 대항해 시대와 함께 동아시아를 향하다
서양 종교 가톨릭은 16세기 대항해 시대를 배경으로 동아시아에 처음 발을 들였습니다. 유럽이 신대륙과 아시아로 눈을 돌리며 상업과 제국의 확장을 시도하던 이 시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신앙 전파라는 명분 아래 아시아로 향했습니다. 가톨릭 선교사들은 신대륙과 동남아시아에 이어 일본, 중국, 조선으로까지 그 활동 반경을 넓혀 나갔습니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는 예수회가 있었습니다. 예수회는 지식과 과학, 문화로 무장한 선교를 통해 단순한 전도 이상의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천문학, 수학, 의학을 전파하며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가톨릭 교리를 자연스럽게 녹여 넣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가톨릭은 단순히 서양 종교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지식과 문명의 상징으로 등장한 셈이었습니다.
가톨릭은 16세기 대항해 시대를 배경으로 동아시아에 처음 발을 들였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중국과 가톨릭의 첫 만남을 이끌다
중국에 가톨릭을 뿌리내리게 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였습니다. 그는 1583년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에 입국한 최초의 서양인 중 하나로, 유교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한문을 유창하게 구사하고 사대부 계층과의 교류를 통해 신뢰를 얻었으며, 서양의 과학 지식을 선물 삼아 접근했습니다. 그의 저서인 <천주실의>는 하늘과 인간, 윤리와 신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유교적 틀 안에 녹여내어 많은 지식인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결과, 가톨릭은 단순한 이방 종교가 아니라 중국 고유의 사상과 철학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교적 조상 숭배와의 충돌로 인해 '제사 논쟁(Rites Controversy)'이라는 큰 갈등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논쟁은 이후 가톨릭이 중국에서 제한되고 금지되는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 전해진 가톨릭, 환영과 박해의 이중 드라마
동아시아에서 가톨릭이 처음 전파된 나라는 일본이었습니다. 1549년 예수회 소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가 규슈 가고시마에 도착하며 일본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센고쿠 다이묘들이 서양의 무기와 상업 이익을 이유로 가톨릭을 환영했습니다. 일본 각지에 교회가 세워지고 수십만 명의 신자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외국 세력의 내정 간섭과 종교 충성도에 대한 불안감, 특히 기독교를 통해 침투할 수 있는 유럽 제국주의의 위협이 의심되면서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1597년 '26성인 순교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에도 막부는 전국적으로 기독교를 탄압했고 '숨은 신자(가쿠레 키리스탄)'라는 독특한 지하신앙 공동체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가톨릭은 박해와 신앙의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조선의 가톨릭 수용, 선교사보다 책이 먼저 들어오다
조선에 가톨릭이 전해진 방식은 일본이나 중국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외국 선교사가 직접 들어오기 전,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국에서 가져온 책을 통해 가톨릭을 자발적으로 수용했습니다. 18세기 후반, 실학자 이승훈과 이벽 등은 <천주실의>와 같은 서학 서적을 통해 기독교 교리에 매료되었고, 1784년 이승훈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조선 최초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조선에서의 가톨릭은 선교사의 전도가 아닌, 지식인의 철학적 탐구와 신앙적 결단에서 출발한 자생적 종교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국가였기 때문에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불효자'로 규정했고, 이는 곧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 등 가톨릭 신자 수천 명이 순교했으며,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은 끈질기게 유지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124명이 복자, 103명이 성인으로 시성되며 오늘날 한국 가톨릭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습니다.
가톨릭 전파의 세계사적 의의와 오늘의 의미
가톨릭의 동아시아 전파는 단순한 종교 확장을 넘어 세계사적 만남과 충돌, 융합의 사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기독교는 유교적 세계관과 마주하며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공존을 시도했습니다.중국에서는 '서학'이라는 지적 자극으로, 일본에서는 박해와 저항의 상징으로, 조선에서는 자발적 수용과 신앙 공동체 형성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동아시아 각국의 정치, 사회 구조와 종교관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반영하는 동시에, 가톨릭이 단순한 종교라기보다는 일종의 문명적 접촉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활발한 가톨릭 활동 국가 중 하나이며, 서울대교구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당을 보유한 교구로 꼽히기도 합니다. 이는 한때 박해받던 가톨릭이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정체성과 사회적 의미를 찾아낸 상징적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의 동아시아 전파는 종교 확장을 넘어 세계사적 만남과 충돌, 융합의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세계사 속의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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