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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항로 개척의 시대, 조선은 무엇을 보고 있었는가? - 유럽의 바다 진출과 조선의 세계 인식 비교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6. 14:47
유럽, 바다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다
15세기 중엽, 오스만튀르크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사건은 유럽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실크로드가 단절되자, 동방의 향신료와 비단을 얻을 수 있는 무역로가 막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유럽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했습니다. 유럽인들은 지리학, 천문학, 항해술의 발달을 바탕으로 미지의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나침반, 해시계, 정밀한 항해지도, 캐러벨(Caravel) 선박 같은 도구들이 이러한 항해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신대륙을 유럽에 알렸고, 바스쿠 다가마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까지 가는 항로를 개척했습니다. 마젤란의 선단은 인류 최초로 세계를 일주하며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증했습니다. 이러한 대항해 시대는 유럽에 무한한 부와 자원, 그리고 제국주의적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유럽은 점차 세계사의 중심축으로 떠오르며 '해양은 곧 제국'이라는 인식을 강화해나갔습니다.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신대륙을 유럽에 알렸다. 사진은 콜럼버스 조각상 조선, 성리학으로 세계를 해석하다
동시에 조선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1392년 건국 이래, 성리학을 국가의 절대적 통치 이념으로 삼으며 내부 질서 정비에 집중했습니다. 태종과 세종 시기에는 천문 관측과 과학 기술이 상당히 발전했고, 훈민정음이 창제되며 지식 대중화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세계 인식은 중화 중심의 사대질서에 철저히 묶여 있었습니다.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사대 외교 체계 속에서 조선은 스스로를 '소중화'라 자처하며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제한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같은 세계지도가 있었지만 지도 속 존재들은 실질적 파악보다는 상징적 배치에 가까웠습니다. 서양은 이적(異敵)으로 분류되어 문명 교류보다는 방어와 배척의 대상이었습니다.
바다를 외면한 조선, 해양의 시대에서 멀어지다
유럽이 바다를 통해 부와 제국의 길로 나아가던 시기, 조선은 해양을 두려움과 혼란의 공간으로 인식했습니다. 고려 말 왜구의 지속적 침입은 해안 방어의 취약성을 드러냈고, 조선은 내륙 중심의 방어 체계와 행정 질서를 강화하게 됩니다. 이러한 선택은 안정적 정권 운영에는 유리했지만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과 대응 능력은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조선 후기에도 이 같은 경향은 지속되었습니다. 조선은 일본과의 제한적 외교, 명.청과의 사대 외교 외에는 사실상 외부와의 접점을 차단했습니다. 마테오 리치나 아담 샬과 같은 서양 선교사들이 청나라에서 활동하며 서양 과학과 지리를 소개하였지만, 조선은 이를 이단으로 여겨 단편적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세계의 확장에 대한 인식은 없었고, 조선은 자신만의 문명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조선이 맞이한 세계, 조선이 놓친 세계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서양에 대한 관심과 학문적 접근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익, 정약용, 박제가와 같은 인물들은 중국을 통해 서양의 기술과 세계관을 접했고, 일부는 지구 구형설과 서양식 천문학, 무역과 해양 활동의 필요성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주류 정치나 정책 결정권과는 거리가 있었고, 그들의 학문은 조선 사회의 구조적 변화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반면 유럽은 아메리카, 인도,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세우고 해양 상권을 장악하며 근대 세계질서를 새롭게 재편해 가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이러한 흐름을 외부의 일, 남의 일로만 인식한 채 자신만의 안정된 틀을 고수하려 했습니다.
비교의 교훈: 두 문명의 선택과 미래
신항로 개척은 단순히 바다를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사건이었습니다. 유럽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며 과감히 도전했고, 그 속에서 지식과 권력, 자본을 축적했습니다. 조선은 반대로 이미 정비된 사회 질서를 보존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조절하며 내부의 안정을 우선시했습니다.
조선의 선택이 단순히 후진적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인쇄 기술, 농업 생산력, 과학적 도구, 유교적 통치 질서는 안정성과 문화의 깊이를 보장했으며, 서구의 제국주의에 맞서 어느 정도 문명적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 변화에 대한 체계적 대응이 부재했다는 점입니다. 바다를 통한 교류와 확장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흐름에 조선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이는 훗날 19세기 외세 침탈에 취약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신항로 개척은 단순히 바다를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세계사 속의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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