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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종교의 동아시아 전파와 조선의 대응 - 충돌과 수용의 역사 속에서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29. 06:40
세계 종교의 동아시아 진출: 문명의 흐름과 함께 온 신앙
세계 3대 종교인 불교, 이술람교, 기독교는 각기 다른 경로와 시기에 동아시아로 전파되며 문명 간 접촉과 충돌, 융합의 장을 열었다. 불교는 기원전 3세기경 인도 마우리아 왕조 시기 아쇼카 왕의 전도 정책을 통해 실크로드와 해상 무역로를 따라 동아시아로 확산되었고, 중국을 거쳐 삼국시대의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이후 불교는 동아시아 각국의 정신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지식인 계층의 철학적 담론뿐 아니라 민간 신앙과 예술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슬람은 7세기 아라비아에서 출발하여 무역을 통해 중국 서부 지역과 해안을 중심으로 점차 전파되었다. 중국 당나라 시기에는 이슬람 상인과 학자들이 광저우와 창안에 거주하며 회회인(回回人)이라는 이름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러한 이슬람 문화는 한반도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는데, 이는 주로 고려시대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교역, 조선시대 명나라를 통한 서역 지식의 유입을 통해 이루어졌다.
기독교는 가장 늦게 동아시아에 도달했지만, 그 전파 방식은 매우 전략적이고 체계적이었다. 7세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당나라에 전파된 바 있으나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본격적인 전파는 16세기 말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와 같은 인물들은 유교 경전과 서양 과학기술, 라틴어 철학을 접목하여 지식인층의 관심을 끌었고, 이는 조선의 실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 세 종교는 모두 문화적 경계를 넘어 동아시아에 발을 디뎠고, 기존의 유교적 질서와 만나면서 조선에서 각기 다른 방식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불교: 조선의 억불 정책 속에서도 살아남은 신앙과 문화
불교는 이미 삼국시대 고구려(372년), 백제(384년), 신라(527년)에 국교로 수용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국정 운영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고려는 불교를 국가 체제와 결합시키며 왕실의 권위를 신성화하고, 대장경 조판이나 호국 불교 등 국가적 사업에도 적극 활용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으며 불교를 타락한 제도로 간주하였다.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은 불교 세력의 정치적 폐단을 지적하며 불교 사찰 수를 제한하고,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는 등 대대적인 억불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단순히 종교의 틀을 넘어 민간 신앙과 예술, 의례 속에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예를 들어 사찰에서 이루어지는 제례 의식, 사찰 건축과 불화, 불경 판각은 민간 문화와 긴밀히 연결되었으며, 산중 승려들은 학문을 지속하며 불교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보우대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불교계 인물들이 유교 문사 못지않은 문화적 위상을 확보했고, 특히 임진왜란 당시 승병 활동은 불교에 대한 긍정적 재조명을 가능케 했다. 이처럼 조선의 불교는 억압 속에서도 지역 공동체와 신앙심 속에 뿌리를 내리며 명맥을 이어갔다.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왼쪽)과 다보탑 이슬람: 교역과 과학기술을 통해 퍼진 조용한 영향력
이슬람은 조선에 직접적인 선교 활동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과학과 문명을 통해 조용한 영향력을 끼쳤다. 고려시대에는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상인들이 개경에 드나들며 회교인촌을 형성하였고, 일부는 귀화하여 '장', '설'과 같은 성씨를 남겼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를 통해 전해진 이슬람식 역법, 천문학, 지리학 지식이 주로 수용되었다.
특히 '회회역법(回回曆)'은 중국 원.명 대에서 활용된 이슬람 역법으로, 정밀한 천체 관측과 수학적 계산법을 기반으로 했으며, 조선 세종 때 도입되어 한동안 사용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 천문학의 정밀도는 한층 향상되었으며, 세계 지리 인식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이슬람의 영향은 직접적인 신앙 전파가 아닌 실용 학문과 지식 체계로 흡수되었다는 점에서 조선의 실학자들과의 접점과도 맞닿아 있었다.
기독교(천주교): 체제와 충돌하며 피어닌 종교개혁의 씨앗
기독교의 조선 유입은 18세기 후반 실학자들의 관심에서 출발했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1784년은 조선 천주교 형성의 기점이 되었고, 윤지충, 정약용, 정약전 등 남인 계열 학자들 사이에서 서학은 새로운 도덕철학과 우주론으로 각광받았다. 천주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인내천에 가까운 신 앞의 인간 평등, 윤리 중심의 신앙, 형벌과 권위주의로부터의 해방을 담은 새로운 사상으로 비추어졌다.
하지만 이는 유교적 국가 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제사를 거부하는 교리는 가부장제 질서의 부정을 의미했고, 교회 조직은 봉건적 위계와 별개의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국가 권력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을 수차례 박해가 이어졌으며, 수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는 오히려 신앙의 결속력을 높였고, 천주교는 19세기 후반 천주교 순교자 성지와 신학교 건립 등으로 점차 제도화되며 민중 속으로 확산되었다.
조선의 대응: 유교국가의 선택과 역사적 변주
조선은 유교를 국가 통치의 이념으로 삼은 나라였으며, 외래 종교에 대한 대응 역시 이 틀 안에서 결정되었다. 불교는 억제하되, 문화적으로는 제한적 수용, 이슬람은 실용 지식으로 흡수, 기독교는 흡수, 기독교는 체제 위협으로 강력히 탄압하는 복합적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는 일관된 폐쇄성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안정성과 사상적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조율의 결과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제국주의의 위협과 함께 종교는 더 이상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니었다. 러시아 정교회, 개신교, 가톨릭이 조선에 물밀듯 들어오면서 외교적 문제와도 얽혔고, 종교의 수용 여부가 곧 근대화와 개방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결국 조선 후기 개항과 더불어 다양한 종교들이 제도화되고, 근대국가로 가는 길에서 새로운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는 조선이 세계 종교 앞에서 단순히 수용하거나 배척한 대상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응전하며 변주한 주체였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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