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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북방 유목의 후예인가: 한국사 속 유목민 계열설의 실체를 세계사 속에서 다시 읽다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14. 23:17
신라와 북방 유목민족설, 어떻게 제기되었는가?
신라가 북방 유목민족 계열이라는 주장은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비교적 이질적인 관점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단순한 추측이 아닌 다각적인 사료와 고고학적 정황, 문화적 특성, 언어학적 단서들에 기반한 이론입니다. 신라가 고대 한반도 남부의 농경 중심 문화권에 속했다는 기존 인식에 반해, 일부 학자들은 신라의 초기 지배층이 북방계 유목 문화를 전유하거나 이주민일 가능성에 주목해 왔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로 고려대의 노태돈 교수, 일본의 오노데라 요시노부 교수 등은 고대 신라의 권력 구조, 장례 문화, 무기 체계, 언어 유사성 등에서 북방 유목민의 특성을 지적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고구려와의 문화적 유사성, 신라 초기 왕족의 명칭과 계보, 언어 구조 등을 통해 신라가 단순한 남방 농경국가가 아닌, 북방의 전통을 계승한 정치체였다는 관점을 견지합니다.
고고학 유물에서 드러나는 북방계 문화 요소
신라의 고분 유적에서 드러나는 장례 방식은 북방 유목민족의 영향력을 시사합니다. 대표적으로 경주 대릉원 일대에서 발견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은 유목민족이 널리 사용하던 목곽 구조와 매우 유사하며, 돌무지를 쌓는 방식 또한 알타이-시베리아 지역의 스키타이, 훈족, 돌궐 등의 고분 형태와 닮아 있습니다.
또한 신라의 금관, 금제 허리띠, 투구 등의 장신구는 그 장식 기법에서 유목민족 특유의 동물 문양(Animal Style)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경주 금관총에서 발견된 금관은 사슴뿔 형상의 장식과 가지 모양이 돋보이는데, 이는 흉노나 돌궐 등 북방 유목민족의 상징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는 단순한 장식 취향을 넘어서, 정신세계나 신앙 체계에서도 공통된 상징체계를 공유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또 다른 유적 사례로는 출토된 무기류에서 북방계 유목민들이 흔히 사용하던 '콤포짓 보우(Composite Bow, 복합궁)'의 부품들이 발견되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이는 전통 농경국가가 아닌 기마전 중심의 전사 문화를 암시하며, 신라의 군사 체계가 농경 중심보다는 기동력을 중시하는 유목 전투 방식에 가까웠다는 점을 뒷받침합니다.
신라 금관에서 보이는 사슴뿔 형상의 장식과 나뭇가지 모양은 흉노나 돌궐 등 북방 유목민족의 상징과 매우 유사하다. 신라 왕족과 초기 지배층의 계보, 언어, 전통
신라가 북방 유목민 계열이라는 주장은 특히 초기 왕족의 명칭과 계보에서도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등 신라 시조들의 이름과 전설은 단순한 전승이 아닌, 특정한 문화적 이주 또는 융합의 기억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김알지의 전설은 '금궤에서 나온 아이'로, 이는 신성한 혈통과 함께 외래적 기원을 암시하는 서사 구조로 보이기도 합니다.
언어학적으로도 일부 학자들은 신라어가 투르크계 언어와 일정한 유사성을 보인다고 주장합니다. 신라어가 남아 있는 문헌은 극히 제한적이나, 고유 지명이나 인명에서 몽골계 또는 퉁구스계 언어와 구조적 유사성이 일부 관찰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는 신라의 지배층이 북방계 언어 집단과 접촉하거나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간접 증거입니다.
또한 '화랑도'와 같은 전사 집단의 존재는 농경 중심 사회에서 보기 드문 제도이며, 유목 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젊은 전사 집단의 전통을 연상케 합니다. 화랑은 단순한 군사 교육 집단이 아닌, 신라 사회의 정치, 종교, 군사 중심세력으로 기능했으며, 이러한 제도의 기원은 북방 전통의 '청년 전사단' 개념과 유사합니다.
신라와 북방 국가들과의 외교, 문화 교류
신라는 고대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고구려, 백제와 함께 경쟁하면서도 외교적으로 북방 세력과의 접촉을 지속해왔습니다. 특히 5세기 이후 고구려와의 긴밀한 교류는 북방문화의 간접 유입 경로로 작용했습니다. 또한 신라는 한동안 돌궐, 말갈, 거란 등의 유목민족과도 외교적 교류 또는 충돌을 거치면서 문화적 혼종 현상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주목할 만한 사례는 신라의 승려 혜초(704~787년)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입니다. 혜초는 신라 출신으로 중앙아시아, 인도를 여행하며 다양한 문화권과 접촉했는데, 이 여행 자체가 이미 신라가 북방 실크로드 네트워크와 간접적 연결고리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이처럼 신라는 단순히 고립된 남방 농경국가가 아니라 기마 문화를 포함한 유목적 요소를 내재한 채 동아시아 대륙문화와 복합적으로 연결된 사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목적 전통과 농경적 체제의 융합: 신라 문화의 복합성
신라가 북방 유목민족 계열이라는 주장은 그 자체로 신라를 유목국가로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주장의 핵심은 신라의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이 단일한 농경 중심의 남방 문화에만 한정되지 않고 북방계 유목 전통과의 융합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복합성은 곧 신라의 유연성과 포용성을 말해줍니다. 북방 유목민 전통에서 기동성과 전사 문화를 받아들이고, 남방 농경 사회의 정착성과 생산 기반을 동시에 내재화한 결과, 신라는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강력한 국가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유목과 농경의 통합형 국가'로서 신라의 독자성을 부각시켜 줍니다.
중앙아시아나 유라시아 일대에서도 유목과 농경이 교차하는 지점애서 강력한 문명이 등장했듯, 신라도 한반도 동남부라는 지정학적 공간에서 두 문명의 접점을 이루며 고유한 문화를 형성한 것입니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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