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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에서 청까지, 고려와 조선을 흔든 북방 민족의 흥망성쇠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5. 18:22
거란의 부상과 '요' 제국의 등장
거란은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유목 부족을 통합하면서 세운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이후 국호를 '요(遼)'로 바꾸며 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합니다. 요나라가 동북아시아 질서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사건은 925년 발해 침공이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세운 나라로, 고구려의 정신적 계승자였습니다. 그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는 이후 만리장성을 넘어 연운 16주라는 요충지를 확보하며 중국 북부를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이민족에게 연운 16주가 넘어갔다는 사실은 중국 한족 정권에게 엄청난 자존심의 상처였지요.
하지만 고려에게 요는 단순한 강국이 아니라 발해를 멸망시킨 원수였습니다. 고려는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을 자임하며 민족적 자긍심을 바탕으로 요와 적대 관계를 이어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는 낙타와 말을 조공 명목으로 보내며 수교를 시도했지만, 고려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거란은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고, 제3차 침입 때 귀주대첩(1019)에서 강감찬 장군의 활약으로 크게 패하게 됩니다. 이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 그 이상이었습니다. 고려가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며 동북아시아에서 독립적 세력으로 우뚝 서는 계기가 되었지요.
거란 문자가 새겨진 거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여진족의 성장과 '금'의 건국
여진족은 고대부터 만주에 정착해 있던 말갈족의 후예로, 발해의 주민 중 일부를 구성했던 종족입니다. 고려와 여진은 한때 평화로운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 국경 침범이 잦아지자 고려는 윤관을 중심으로 여진 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윤관은 9성(九城)을 축조하고 여진을 밀어내며 고려의 북방 방어선을 확보했지만, 이 성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지요.
1115년, 여진족의 지도자 아골타(阿骨打)는 여러 부족을 통일해 금나라(金)를 세우고, 곧 북송과 요나라를 멸망시킵니다. 이로써 금나라는 동북아를 대표하는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합니다 고려는 금과의 외교에서 신중함을 유지하며 살아남았지만, 강력한 북방 민족의 등장은 동북아 국제 질서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금나라는 한족 문화의 많은 요소를 수용하면서도 여진 고유의 언어와 제도를 유지하려 했고, 이는 후일 청나라의 통치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후금에서 청으로, 명을 무너끄린 여진족의 반격
16세기 말, 명나라는 내와적 혼란으로 점점 힘을 잃고 있었습니다. 이 틈을 타 여진족의 한지파를 이끄는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주변 부족을 규합해 1616년 '후금'을 건국합니다. 누르하치는 고구려 유민 계통의 유산을 계승한 만주족으로서, 군사와 정치 양면에서 명과는 다른 통치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1621년에는 심양을 함락시키고 후금의 수도로 삼았고, 1636년에는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조선을 침공해 병자호란을 일으킵니다.
병자호란은 조선에게 있어서 역사적 치욕이었습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은 사건은 조선의 외교사에서 가장 굴욕적인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현실 외교를 바탕으로 청과의 긴장 속 우호를 유지하며 생존을 도모하게 됩니다. 청은 이후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황금기를 맞이하며,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청 제국의 전성기와 몰락, 그리고 한국사의 변화
청나라는 유목 민족이 세운 국가였지만, 한족의 제도와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 중국 제국의 틀을 완성했습니다. 특히 강희제와 건륭제는 안정된 통치를 바탕으로 티베트, 신장, 몽골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장하며 다민족 제국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아편전쟁과 같은 대외적 충격, 내부의 부정부패와 농민 봉기로 인해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며 마침내 청나라는 붕괴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됩니다. 이는 동아시아 제국 질서가 완전히 재편된 사건으로, 중국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 역시 이 무렵 대한제국으로 체제를 정비했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지요.
고려와 조선의 눈으로 본 북방 민족의 세계사적 의미
고려와 조선은 동아시아 유목 제국들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으며 독자적인 국가 정체성을 지켜냈습니다. 거란과의 싸움에서 보여준 고려의 자주성, 금과의 외교 전략, 청과의 병자호란 이후 실리 외교 등은 모두 유목 민족과 농경 민족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던 세계사적 구조 속에서 조선이 어떻게 생존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특히 발행의 멸망 이후 고려가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대립각을 세운 점, 조선이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다 청과 갈등을 빚은 점은 단순한 외교사 이상의 민족사적 메시지를 지닙니다. 이러한 선택들은 결국 고려와 조선의 정체성과 민족적 기억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 우리가 한민족의 역사적 뿌리는 되돌아보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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